고종, 제중원을 설립하다

고종, 제중원을 설립하다

  • 332호
  • 기사입력 2015.09.23
  • 편집 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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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 고종은 무능하다?

조선의 제26대 국왕인 고종 하면 연상되는 인물은 아버지 대원군과 왕비(사후 명성황후)다. 고종은 카리스마 넘치는 아버지의 두루마리 자락과 영특하기 그지없는 부인의 치마폭을 오가며 늘 무대 뒤에 숨기만 했단다. 무능하고 줏대 없고, 나라까지 망쳐놓은 못난 군주. 그러나 고종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과연 얼마만큼 정확한 것일까?
고종은 분명 행운아였다. 철종에게 왕자가 없던 터라 왕위 계승자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아버지 대원군은 왕이 된 아들의 권력을 굳건히 하고자 안동김씨 세도가문을 짓눌렀다. 기득권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내정개혁을 단행했다. 걸림돌은 있는 대로 다 뽑아버렸다. 아들을 위해 악역을 도맡은 셈이다.

그러나 아들과 며느리의 입장은 달랐다. 아버지 대원군의 카리스마, 쇄국정책에 대한 유생들과 백성들의 지지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고종과 왕비는 쇄국정책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나라의 문에 빗장을 단단히 걸어둔다고 해서 무엇인들 해결될 수 있을까? 방어만으로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고종과 왕비는 그래서 문호개방 이후 국가 차원의 개화 프로젝트를 세우고 실천에 나섰다. ‘동도서기(東道西器)’. 정치체제, 사회질서, 사상, 문화, 종교 등 인간사회의 근본이 되는 부분은 우리 것을 고수하되 무기나 산업, 과학기술 등 실용적인 분야는 서구의 근대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꾀한다는 논리였다. 밖으로는 일본과 청나라에 견문단을 보내 그들의 근대화 상황을 관찰하고, 안으로는 통리기무아문, 별기문, 박문국 등을 설치해 서양 문물의 수용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 등 서구 열강과 외교통상조약을 맺었고, 김옥균을 활용해 일본과 교류하면서 전방위적으로 근대화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다. 대원군측이 시도한 정변과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근대화를 향한 그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고종과 조선 정부가 구상하고 실천에 옮긴 근대화 프로젝트의 내용 중에는 의료 근대화 작업이 들어 있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생사(生死)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한 나라의 국왕이라면 백성들의 질병, 특히 떼죽음을 몰고 다니는 전염병을 다스리는 것은 인정(仁政)의 기초가 아니던가? 한의학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을진대, 유일한 방법은 근대 서양의학을 수용하는 것밖에 없었다. 제중원은 이러한 고민 끝에 탄생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서양식 국립병원이었다. 제중원의 설립자는 고종과 조선 정부였던 것이다.


* 제중원, 조선 백성에게 첫 선을 보이다

“본아문(本衙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시의원(施醫院, 제중원) 한 곳을 북부 재동(齋洞) 본아문 북쪽 두 번째 집에 설치하고 미국 의사 안련(安蓮, H. N. Allen)을 초빙했으며, 더불어 학도(學徒)와 의약(醫藥) 및 여러 도구를 갖추었다. 오늘부터 매일 미시(未時, 오후 1-3시)부터 신시(申時, 오후 3-5시)까지 병원을 열고 약을 제공할 것이다. 무릇 질병이 있는 자는 와서 치료를 받으라. 약값은 나라에서 지급할 것이다.

1885년 4월 3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약칭 외아문, 지금의 외교부)에서 내건 이 방문(榜文)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국립병원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정부의 공식 안내문이었다. 이 병원의 최초 이름은 광혜원(廣惠院). 그런데 4월 26일, 조선 정부는 광혜원이라는 명칭을 백지화하고 새로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외아문 산하에 설립한 것은 이 병원을 백성의 질병을 치료하는 기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서양의 새로운 의학지식을 도입하고 학습하는 기관으로 삼기 위해서였다. 조선 정부가 병원 부지와 건물, 시설, 예산, 인력(주사와 하인) 등을 제공했고, 미국인 의사에게 급여를 지급했다. 이에 따라 당시의 선교사들도 각종 보고서에서 제중원을 ‘왕립병원’, ‘정부병원’ 등으로 표기했다. 결국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설립하고 운영한 국립병원이었다.

알렌이 첫 진료에 들어간 4월 9일, 방문(榜文)을 본 20명의 조선인 환자가 제중원을 찾았다. 1886년 1년 동안 만 명 정도의 조선인 환자가 외래진료와 수술을 받았다. 환자들은 아래로는 걸인, 나병환자로부터 위로는 궁중의 귀인까지 전 계층을 망라했다. 초창기 제중원에서 진료 받은 환자들을 보면, 말라리아(학질) 환자가 가장 많았고, 소화불량, 피부병, 매독 등이 뒤를 이었다.


* 제중원, 위기로 치닫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제중원은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일차적으로는 청나라의 내정간섭과 조선 정부의 재정난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중원의 구성원들에게도 문제가 많았다. 의료선교사 빈턴(C. C. Vinton)은 진료보다는 선교에 더 관심이 많아 조선 정부와 자주 충돌했다. 한국인 주사들도 근무에 태만하고, 공금을 유용하는 등 부패한 관리로 변해갔다.

1893년 제중원 의사로 부임한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에비슨(O. R. Avison). 그는 이듬해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기간에 조선 정부에게서 제중원의 독자적 운영권을 넘겨받는 데 성공했다. 고종으로서는 일본군에게 연금된 상태에서 제중원을 일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었다. 그 후 에비슨은 미국의 갑부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로부터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 1904년에 미국북장로회 소속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고 제중원을 떠났다. 이듬해 고종황제와 대한제국 정부는 미국북장로회로부터 제중원의 부지와 건물을 환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