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 박는집

이 해 박는집

  • 340호
  • 기사입력 2016.01.26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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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 서울 종로의 이 해 박는 집(1926)

1926년 6월 10일, 서울의 종로.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 사이로 순종황제의 상여가 지나가고 있다. 서글픈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나라 잃은 것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태정태세문단세...'의 마지막 임금(황제)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런데 이 사진을 보노라면 왼쪽 위에 우스꽝스런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해 박는 집'. 의치(義齒)마저 그려져 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치과병원과는 달리 보철(補綴) 쪽만이 부각된 이름이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황제도 1903년에 보철 시술을 받았다. 황제는 앞니가 하나 빠져 일본 고베에서 개업하던 미국인 치과의사 소어스(James Souers)를 불러왔다. 그러고는 마음 놓고 식사를 하기 위해 낯선 이방인에게 입을 벌렸다. 소어스는 사기질 치아를 금죔쇠로 끼워 맞추는 보철 시술을 했다. 황제는 시술 대가로 거금을 지불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치과의사가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보철만 담당하는 입치사(入齒師)는 치과의사와 어떻게 달랐을까?

*** 입치사, 수적으로 치과의사를 압도하다

우리나라에서 치과의사는 1893년에 등장했다.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野田應治)가 우리나라에 건너와 인천과 서울에서 개업한 것이다. 그 후 치과병원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1914년 의사규칙과 함께 치과의사 규칙이 반포됨에 따라 정규 치의학교육을 받은 치과의사들이 속속 등장했다. 또한 이 해에는 일본 유학 출신의 함석태가 한국인 최초로 치과병원을 개업했다. 이 무렵 서울의 치과의사는 일본인 4명, 미국인 1명 정도였다.

그럼 입치사는 무슨 일을 했으며, 언제 등장했을까? 입치사는 '이 해 박는집', '잇방', '치술원(齒術院)', '입치세공소(入齒細工所)', '구강치아미술원(口腔齒牙美術院)' 등 재미있는 간판을 내걸고 간단한 발치(拔齒)와 보철 시술을 했다. 말 그대로 이를 해 넣는 기술자이다. 이 직업은 일본에서 들어왔다. 1906년 일본에서 치과의사법이 개정되면서 발붙일 곳이 사라진 상당수의 일본인 입치사들이 1907년 이후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건너왔다. 한국에서는 입치사의 영업을 허가했다. 한국인 입치사도 속속 등장했다. 1907년 서울 종로에서 개업한 최승룡을 비롯해 일본인 입치사의 보조로 일하던 사람들이 '잇방'을 차린 것이다.

입치사들이 빠른 속도로 한국 시장을 점유하면서 치과의사의 입지가 좁아져버렸다. 그래서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입치사 제도를 폐지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아예 입치사와의 경쟁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되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 틀니에 놀라더니, 어느새 장식으로 금니까지

한국인들의 구강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었다.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의 기록에 의하면, 한국인은 누구나 훌륭하고 진주같이 하얀 치아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보철은 발달하지 않았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 것이 상식이었다. 한국인에게 보철은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알렌에 따르면, 한 외국인 선장이 주막에서 밥을 먹은 후 입에서 틀니를 빼자 구경하던 한국인들이 기겁하며 도망쳤다고 한다.

외국인들의 발달된 치과술, 특히 국소마취제를 사용한 무통 발치(無痛拔齒)는 한의사에게 의존해오던 한국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치과 전문의는 아니었지만, 알렌만 해도 제중원에서 발치술이나 구강외과 시술을 했다. 반면 틀니나 보철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은 상당했다. 어떤 이는 일본인 치과의사 노다에게 보철 시술을 받은 후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린 나머지 의치의 연결 고리에 금 대신 백금을 썼다.

하지만 이런 기피증도 얼마 후 사라져갔다. 오히려 돈푼 꽤 있는 부자, 모양내기 좋아하는 멋쟁이나 기생들이 액세서리 삼아 중절치 측절치 등 건전한 치아에 금으로 전부 금관 또는 개면 금관을 해 씌우고 번쩍거리며 다니는 것이 일대 유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