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의학도의 <br>형설지공(螢雪之功)과 항일운동

일제강점기 의학도의
형설지공(螢雪之功)과 항일운동

  • 342호
  • 기사입력 2016.02.25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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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한국 지도에 이름을 올리다

한국인이라면 볼 때마다 정겹고, 가슴 뭉클해지는 한국 전도(全圖). 그런데 이 지도에는 무언가 색다른 점이 있다. 8도 곳곳마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 지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1924년에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를 졸업한 한국인 학생은 모두 49명. 그들은 일본인 졸업생들과 별도로 그들만의 졸업앨범을 만들었다. 그 이름은 『형설기념(螢雪記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관립학교에서 극심한 민족차별을 받으면서도 학업에 힘써 졸업에 성공한 그 감격스러운 느낌을 표현한 것이리라. 또한 이들 중에서 훗날 김동익(金東益), 박병래(朴秉來), 이선근(李先根), 이종륜(李鍾綸), 최상채(崔相彩) 등 9명의 의학박사가 나온 만큼, '형설'이라는 어휘는 정말 잘 어울린다.

이 지도는 이 졸업앨범의 표지와 머리말 다음에 실려 있다. 졸업생들은 이 지도 위에 자신의 고향에 해당하는 지점에 이름을 올렸다. 자신과 고향과 조국에 대한 애정을 당당하게 표현한 것이다. 공부하던 책상머리를 비춘 '형설'만이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비출 '형설'이 되고자 하는 소망과 의지가 느껴진다.

그들이 4년 동안 다녔던 경의전은 대체 어떤 학교였을까?


191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전문학교관제'와 '경성의학전문학교규정'이 반포되어 경의전이 문을 열었다. 기존의 조선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를 인계했다. 입학자격은 한국인은 16세 이상의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일본인은 17세 이상의 중학교 졸업자였다. 기초 강의는 1~2학년 과목으로, 임상 강의는 3~4학년 과목으로 편성되었다. 교사(校舍)는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네거리에 있었다.

3.1운동의 선두에 서다

경의전의 한국인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불만이 많았다.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며 민족차별을 받은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인 학생은 5년제 중학교를 졸업했다며 한국인들의 '본과'와는 별도로 '특별의학과'를 편성했다. 특별의학과에는 독일어, 해부학, 조직학 등 알짜배기 교과목의 수업시수가 더 많이 배정되었다. 일본인 졸업생에게는 일본 영토 어디에서나 개업할 수 있는 '일본 문부성 지정 의학전문학교' 졸업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한국인 졸업생에게는 한국 안에서만 개업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 지정 의학교' 졸업자격만 허용되었다. 게다가 수업은 모두 일본어로 진행되었다. 수신(修身, 지금의 윤리) 시간에는 일본식 가치관과 식민사관이 주입되었다.

나라 전체를 보더라도, 191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다. 조선인들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헌병과 순사들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토지조사사업과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몰락해갔다. 사회문화 분야에서도 민족차별을 당했고, 조선인들은 열등하다는 궤변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만 했다.

경의전의 한국인 학생들은 학교 안, 나라 안의 서글픈 현실을 체험하며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3.1운동의 선두에 설 수 있었다. 1919년 2월 김형기(金炯璣)와 한위건(韓偉健)은 경의전 학생대표 자격으로 3.1운동 준비작업에 참여했다. 3월 1일에는 김형기, 한위건, 김탁원(金鐸遠), 백인제(白麟濟), 길영희(吉瑛羲), 나창헌(羅昌憲), 이의경(李儀景, 작가 이미륵) 등 상당수의 재학생이 3.1운동의 첫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특히 이익종(李翼鍾)은 지금의 종로 4가에 모인 군중 앞에서 연설을 통해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또한 1918년에 경의전을 졸업한 강기팔(姜基八)은 이듬해 3월 8일 평남 강서군 함종면 일대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고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총독부측의 한 문헌에 의하면, 당시 서울에서 3.1운동과 관련해 구금된 학생들을 소속 학교별로 나누었을 때 경의전이 31명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경의전의 한국인 학생 수를 감안하면, 20%를 넘는 학생이 구금되었다. 1919년에 경의전 학생 79명이 퇴학당한 것도 3.1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형기가 징역 1년, 이익종이 10개월, 김탁원이 7개월, 백인제 등은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일본인 해부학 교수의 망언에 맞서다


1921년 5월 말 한 일본인 교수의 '망언'으로 경의전은 또다시 들끓게 되었다. 해부학 실습실의 두개골 하나가 없어진 것을 두고 해부학 교수 구보(久保武)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국인 학생의 소행이 분명하다면서, 조선인은 원래 해부학적으로 야만인에 가깝다는 폭언을 했다. 이에 평소 민족적 굴욕감을 참고 견뎌왔던 194명의 조선인 학생 전원이 구보 교수의 수업을 거부했다. 이에 학교측은 '주동자' 9명을 퇴학시키고, 나머지 185명을 무기정학 처분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자 한국인 학생 전원은 자퇴를 신청하며 맞섰다.

이 사건은 언론 보도를 타고 금세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경의전 졸업생들로 구성된 교우회(校友會)와 학부형들이 중재에 나섰다. 사이토(齋藤實) 총독마저도 3.1운동 때처럼 조선인 전체가 들고일어날 것을 우려해 원만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사건 발생 한 달만인 6월 28일 학교당국이 학생 징계조치를 철회하고 구보 교수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약속함으로써 상황이 수습되었다. 구보는 결국 이듬해에 학교를 떠났고, 일본에서 정신병에 걸려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