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틈으로 스며드는 <br>저승사자, 연탄가스

문틈으로 스며드는
저승사자, 연탄가스

  • 360호
  • 기사입력 2016.11.27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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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1959년에 있었던 일이다. 13세 소녀가 시골에서 상경해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하루는 고향에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19공탄에 불을 피웠는데, 그 피어오르는 불꽃이 하도 신기해서 유심히 구경하다가 그만 가스에 중독되어 숨지고 말았다. 1961년에는 서울 제기동에서 일가족 6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5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집주인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려오다가 자기들이 쓰던 안방과 건넛방을 세를 주고, 대신에 마루를 방으로 고쳐 쓰기 시작했는데 3일 만에 참변을 당했다.

1962년에는 서울 영등포의 한 산부인과병원 산실(産室)에서 연탄가스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갓 태어난 신생아가 세 살 난 누나와 함께 숨졌다. 같은 해 인천의 한 호텔에서는 신혼부부가 첫날밤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검찰의 현장검증을 통해 객실 장판 가장자리가 뚫려 있었고, 연탄을 피워본 결과 연기가 새어나올 뿐만 아니라 굴뚝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는 198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1980년 1월, 당시 최고 명문이었던 전주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시험을 치른 고3 학생이 부천의 형네 집에서 지내며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었다. 그 학생은 서울대병원으로 긴급히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학생은 서울의대에 합격했었다.

우리나라에 연탄이 널리 보급된 것은 6·25전쟁 때, 특히 9.28 서울 수복 직후부터였다. 처음에는 경상도의 일부 지방에서 난방 및 취사용으로 사용했다. 정부의 강력한 산림녹화정책으로 나무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탄은 화력이 좋았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결국 연탄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 일반 가정의 주된 에너지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만 해도 1962년과 1964년 사이에 연간 184만여 톤에서 371만 톤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자 1965년 이후부터 연탄 공급이 부족해졌고, 정부는 연탄의 안정적 공급과 연탄가격 관리에 늘 애를 먹었다. 서민들로서도 연탄은 첫 손가락에 꼽는 생필품이었고, 특히 김장 김치와 함께 월동 준비물의 양대 산맥이었다. 연탄은 곧 재산목록 1호였다. 오죽하면 동네마다 연탄을 조금씩 훔쳐가는 좀도둑들이 있었을까.

그러나 연탄은 약 주고 병 주는 이율배반적인 존재였다. 연탄이 불붙을 때 산소의 공급이 원활치 않아 내뿜는 일산화탄소가 문제였다. 22공탄 한 개가 배출하는 일산화탄소량은 대체로 20명의 인명을 앗아갈 수 있는 양이었다. 일산화탄소가 공기 중에 0.5%만 포함되어 있어도 그 공기를 마신 사람이 5~10분 만에 죽을 만큼 무서웠다. 일산화탄소는 냄새, 맛, 색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알아채기가 어려워서 더욱 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에 해마다 방문 틈으로, 방바닥 갈라진 틈으로 스며들어와 앗아간 생명만도 천 명이 넘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다행히 깨어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 중 상당수는 후유증으로 실어증이나 치매, 정신질환에 걸렸다가 결국은 쇠약해지거나 혼수상태에 빠져 사망하기도 했다.


행정당국은 연탄가스 중독사고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1967년 서울시 경찰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마련해 시민들에게 홍보했다. ① 아궁이, 온돌, 연통 등 시설을 보완할 것, ② 부엌에 환기장치를 만들 것, ③ 부엌과 방이 통하는 문은 밀폐할 것, ④ 방 틈에는 이중으로 종이를 바를 것, ⑤ 습기 찬 연탄은 말려서 피울 것, ⑥ 연탄불은 낮에 갈아 넣을 것, ⑦ 연탄을 갈아 넣을 때는 마스크를 할 것 등이었다.

의료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도 응급처치법과 보다 근본적인 대책의 연구, 개발을 위해 노력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비타민 C가 연탄가스 중독에 효과가 있다거나 호박산소나 주사만으로도 중독된 환자가 깨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공군에서는 연탄가스경보장치를 개발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에서 국내 최초로 고압산소기를 제작했고, 공군에서도 인체용 산소가압실 제작에 성공했다. 대한탄업주식회사는 10년 동안 제독연탄을 연구, 개발했다고 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968년 서울시가 제독연탄 발명에 현상금 1천만 원을 내걸자 5일 만에 전국에서 290점의 작품이 쇄도했다. 그 가운데 아궁이 고치는 이들의 출품이 30%나 되어 이목을 끌었다.

1970년대에도 연탄가스 중독 대응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속출했다. 한 사립대학병원에서는 식초요법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식초요법으로 효과를 본 환자도 나왔지만, 중독된 환자가 식초를 마시고 목에 심한 중화상을 입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뒤이어 암모니아-초산 혼합물도 등장했고, 겨울철 밥상의 필수품인 동치미 국물이 효과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결핵, 기생충, 그리고 연탄가스 중독사고. 한마디로 한국의 1950~70년대는 ‘후진국형 질병의 전성시대였다.’ 21세기에 들어서도 결핵환자가 적지 않고, 연탄가스가 자살 수단으로 쓰이고는 있지만, 그 후진국형 질병들은 암, 심혈관질환 등에 자리를 내주고 사실상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한강의 기적’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서뿐만 아니라 보건의료계의 이와 같은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