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계의 의료선교

개신교계의 의료선교

  • 348호
  • 기사입력 2016.05.31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수경 기자
  • 조회수 9195

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 의료선교사 홀 부부의 헌신

1890년 미국 뉴욕의 빈민가에서 캐나다 출신의 홀(William James Hall)과 조수인 여의사 셔우드(Rosetta Sherwood)가 의료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셔우드는 미국북감리회 여성해외선교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위촉되어 ‘미지의 나라’ 조선에 파견되었다. 이듬해에 홀도 미국북감리회 소속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들은 곧 조선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홀은 평양지방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평양 선교는 쉽지 않았다. 평양 주민들의 외세 배척 성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관리와 주민들이 조선인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던 중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생했다. 그 격전장이었던 평양에서는 무고한 조선인들의 인명피해가 잇달았다. 홀은 영국영사관의 철수 권고도 뿌리치고 혼신을 다해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그러나 그는 과로로 쓰러진 후 말라리아에 걸려 숨지고 말았다. 조선에 온 지 3년 만이었다.

졸지에 과부가 되어버린 로제타 셔우드 홀. 남편을 빼앗아간 조선이 싫어서 미국으로 돌아갈 만도 했다. 그러나 서울의 보구여관(保救女館)과 평양의 광혜여원(廣惠女院)에서 여성 환자 진료에 전념했고, 조선인 여의사 양성과 시각장애인 진료 및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조선에서 태어난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도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해주 구세병원에서 결핵환자 진료에 전념했다.

이와 같이 조선에서 청춘을 다 바치며 의료선교활동을 벌이는 서양인들이 개항기부터 등장했다.


* 의료선교의 양면성

1885년부터 알렌, 헤론 등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들이 국립병원 제중원에서 의료사업을 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미국북감리회 의료선교사들은 민간병원을 개원해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1885년 9월 10일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은 자기 집에서 시병원(施病院)을 열었다. 환자의 대다수는 서울의 하층민이었다. 1887년에는 여의사 하워드(Meta Howard)가 이화학당 구내에 여성병원을 개설했다. 왕비(명성황후)가 하사한 이름은 보구여관. 부인병에 대한 전문적인 진료의 효시였다.

1890년을 전후해 영국성공회, 미국남장로회, 미국남감리회, 캐나다장로회, 호주장로회 등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대부분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병행했다. 그래서 1890년대 중후반부터 선교병원이 지방 주요 도시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평양, 선천, 함흥, 성진, 인천, 개성, 전주, 광주, 대구, 부산 등지에서 선교병원이 문을 연 것이다. 그러나 의료기관의 규모나 시설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초가집 한 채로 구성된 진료소에 1명의 의료선교사가 근무하는 ‘1인 의사 병원’이 대다수였다. 나중에 서구식 벽돌 건물로 병원을 신축 또는 증축했지만, 의료여건이 크게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의료선교사들은 지방순회 진료를 병행하며 조선인 진료에 헌신했다.

19세기 말, 미국은 다른 서구 열강 및 일본과 마찬가지로 영토적, 경제적 팽창을 도모하던 자본주의국가였다. 미국의 팽창주의는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나타났다. 미국이 진출하는 곳에는 언제나 상인과 선교사가 먼저 들어갔다는 사실이 이런 점을 증명했다. 당시 조선은 미국의 자본주의적 욕심을 자극할 만큼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 개신교에게는 훌륭한 선교 무대였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미국 정부의 지원 없이, 또 때로는 미국 정부와 충돌하면서 스스로의 종교적, 인도주의적 확신을 가지고 선교와 의료사업에 나섰다. 선교사들은 기독교와 서구 문명을 전해주기 위해서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종교적, 인종적 우월감과 서구 문명의 월등함에 대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팽창하는 미국의 개척자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랬기에 조선인들과 적지 않은 마찰과 대립을 겪었다.

* 선교병원의 상징, 세브란스병원

서울과 지방에 여러 선교병원이 들어서고 의료선교사업도 계속 발전해 갔지만, 그래도 이들 병원은 여러 면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다. 특히 의료선교사들이 각각 교파별로 나뉘어 선교와 진료활동을 하는 데서 오는 문제가 컸다. 의학은 날로 발전하고 있었고 병원도 규모가 커져가고 있었지만, 서울만 해도 미국북장로회, 미국북감리회, 영국성공회 등이 따로 운영하는 병원과 진료소가 난립해 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1895년 일본인들이 서울에 지은 한성병원은 당시로서는 최신식 병원으로서 여러 선교병원을 압도하고 있었다.

1899년 안식년 휴가를 받아 미국에 건너간 의료선교사 에비슨(O. R. Avison)은 서울의 선교병원을 통합해 큰 병원을 짓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을 본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H. L. Severance)가 거액을 기부했다. 에비슨은 그 기부금으로 서울 남대문 밖에 세브란스병원을 지었다.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서울의 다른 의료선교사들은 이 병원에 합류하지 않았다. 1904년 허스트(J. W. Hirst)가 두 번째 의사로 부임했다. 에비슨과 허스트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가르치고 진료하는 일 외에도 시내 환자들을 방문 진료했다. 그러면서 세브란스병원은 차차 한국내 선교병원의 상징이 되었다.

1905년 미국북장로회 선교부의 공식적인 인정 아래 세브란스의학교가 출범했다. 그런데 초기에는 강의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빈 병실을 이용해 강의했다. 학생들은 진료소의 조수 일, 드레싱, 약품 조제 등 여러 일에 참여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다양한 임상경험을 갖도록 했다. 1908년 6월 3일 세브란스의학교는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