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와 강간죄?

  • 3호
  • 기사입력 2002.01.02
  • 취재 이형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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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수라는 연예인의 출현으로 인해 트렌스젠더는 더 이상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하느님만이 결정할 수 있었던 성을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트렌스젠더의 당위성에 대한 논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트렌스젠더와 관련한 다소 의외의 대법원 판례가 있어, 이를 소개하면서 이 판례에 함의되어 있는 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소개할 사건은 1996년 6월 11일에 선고된 대법원 96도791판결이다.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호객행위를 하던 트렌스젠더(30세) 아무개씨를 남성 3명이 집단으로 폭행한 후 강간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내용은 다음과 같다.

"형법 제297조는 강간죄를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라고 하여 객체를 부녀에 한정하고 있고, 위 규정에서 '부녀'라 함은 성년이든 미성년이든, 기혼이든 미혼이든 불문하며 곧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무릇 사람에 있어서 남자, 여자라는 성의 분화는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후 태아의 형성 초기에 성염색체의 구성(정상적인 경우 남성은 XY, 여성은 XX)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발생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각 성염색체의 구성에 맞추어 내부생식기인 고환 또는 난소 등의 해당 성선이 형성되고, 이어서 호르몬의 분비와 함께 음경 또는 질, 음순 등의 외부성기가 발달하며, 출생 후에는 타고난 성선과 외부성기 및 교육 등에 의하여 심리적, 정신적인 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법 제297조에서 말하는 부녀, 즉 여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도 위 발생학적인 성인 성염색체의 구성을 기본적인 요소로 하여 성선·외부성기를 비롯한 신체의 외관은 물론이고 심리적·정신적인 성,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수행하는 주관적·개인적인 성역할 및 이에 대한 일반인의 평가나 태도 등 모든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사회통념에 따라 결정하여야 한다.

아무개씨는 어릴 때부터 정신적으로 여성에의 성 귀속감을 느껴 왔고, 성전환 수술로 인하여 남성으로서의 내·외부성기의 특징을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남성으로서의 성격도 대부분 상실하여 외견상 여성으로서의 체형을 갖추고 성격도 여성화되어 개인적으로 여성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해 가고 있다 할지라도, 기본적인 요소인 성염색체의 구성이나 본래의 내·외부성기의 구조, 정상적인 남자로서 생활한 기간, 성전환 수술을 한 경위·시기 및 수술 후에도 여성으로서의 생식능력은 없는 점,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 일반인의 평가와 태도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보면 사회통념상 여자로 볼 수는 없다."

이상의 대법원 판결을 요약하면, 형법의 규정은 강간죄의 대상을 '부녀'로 한정하고 있으며, 트렌스젠더는 아무리 성전환수술을 하였고, 또 본인 스스로 여성으로서의 성의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본질상 여성이 아니므로 결국 트렌스젠더를 강간하여도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법원의 판결을 바라보는 여러분들의 생각은 다양할 것으로 보인다. 형법이 강간죄의 객체를 '부녀'로 한정하였으니, 남성이 성전환을 하였어도 여전히 남성이므로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강간죄의 객체가 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결을 지지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며, 강간죄를 범한 사람은 분명 피해자가 여성이라 생각하고 강간을 하였으며 피해자 역시 스스로는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렌스젠더이기 때문에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이는 형평에 맞지 않는 경직된 법률해석이라는 비판을 하는 학생도 있을 것이다. 아마 필자의 추측으로는 후자의 입장인 학생들이 다수일 것 같다.

죄형법정주의란 국가의 자의적인 형벌권 남용으로부터 국민의 신체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제정한 법률에서 정하고 있는 범죄에 대해서만 법률이 정하고 있는 형벌로써 처벌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러한 죄형법정주의의 취지를 충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형법의 규정을 매우 엄격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죄형법정주의를 '범죄인의 마그나카르타'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범죄인들의 강간죄 부분은 무죄로 보았으나 강제추행치상죄로 피고인들을 처벌하였다.

필자가 이 판례를 소개한 것은 대법원의 판례를 비판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트렌스젠더에 대한 당위성을 피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법' 또는 '법학'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를 넓히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법'이 추구하는 목표는 '정의의 실현'이다. 정의의 실현이란 사회구성원간의 약속인 규범에 따라 서로의 이익을 침해하지 아니하고 공정하게 경쟁하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을 어김으로써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불공정한 행위를 하는 경우에 이를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이 바로 법의 사명이다. 법은 '게임의 룰'이며, 법관은 게임이 정해진 룰에 의해 진행되는가를 살피는 '심판관'인 것이다. 심판관은 게임의 룰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 객관적이어야 한다. 심판관이 특정인의 특별한 사정을 고려하여 게임의 룰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순간 룰은 더 이상 룰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법에 대한 불신은 바로 법의 해석과 집행에 있어 객관성을 신뢰하지 않은데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또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자조적 탄식도 바로 이러한 분석과 맥락을 같이한다. 법은 흔히 저울(천칭)로 비유된다. 여기서 저울은 형평을 의미한다. 저울의 추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형평성을 상실한다면 그 저울은 이미 저울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람들(법조인, 법학자,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 등)은 냉철한 이성을 소유하고 매우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해야한다.

그렇다고 법조인은 냉정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법조인 역시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이어야 한다. 필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따뜻해질 때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것을 평소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사정을 완전히 무시하고 법대로만(?)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들어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법조인에게는 더욱 요구된다. 그러나 사정을 고려는 하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의적인 법해석과 적용은 양면성이 있는 것이다. 자의적인 해석이 딱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처지를 벗어나게 해 줄 수는 있으나 반대로 다른 사람을 딱한 처지에 빠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법은 그 경직성에 대한 비판을 받으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미 여성으로 외형이 바뀐 트렌스젠더를 '부녀'로 보면 그만이지, 굳이 본질상 여성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법원의 태도를 냉소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법'의 본질을 여러 학생들이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