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외설의 논쟁

  • 5호
  • 기사입력 2002.02.01
  • 취재 이형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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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미술 series Ⅰ> 글 | 법학과 김민호 교수님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여인들
-예술과 외설의 논쟁-

Ⅰ. '법과 미술'의 연재를 시작하며...
이미 국내에서도 법과대학의 커리큐럼에 '법과 예술'이라는 강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소수 법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법과 예술', 좀 더 세분화해서 '법과 문학', '법과 영화', '법과 미술' 등의 글을 쓰시는 분도 있다. 예를 들면 최종고 교수의 '법과 미술', 장경학 교수의 '법과 문학'(교육과학사), 안경환 교수의 '법과 문학사이'(까치), '이카루스의 날개로 태양을 향해 날다-법과 영화사이'(효형) 등이 대표적인 글들이다.

그러나 '법과 예술'이라는 영역은 어떠한 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는 것인가라는 컨센서스는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면 '법과 미술'이라는 표제어를 쓰고는 있으나, 어떤 분은 미술의 창작활동이나 미술품의 전시·매매 등에 관련한 법률문제를 연구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분도 있고, 과거 침략자들의 미술품 약탈에 따른 국제법상의 문제를 연구하는 분도 있으며, 또 어떤 분은 미술작품 속에 나타나는 법에 대한 상징성을 연구하는 분도 있다.

필자 역시 '법과 미술'의 탐구 영역을 설정한 바는 없다. 그저 미술작품을 법학자의 시각에서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나타나는 법의 상징성, 법률적 사건, 법률적 해석, 법적 감정 등을 서술해 보고자 하는 실험적 단계에 있다. 이러한 점을 독자제위께서 이해해 주시고,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하여 많은 조언이 있기를 바란다.

Ⅱ.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여인들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르느와르의 '목욕하는 여인들'이다. 르느와르(Renoir, Pierre-Auguste, 1841∼1926)는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잘 알려진 화가이다. 인상주의란 1860∼9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유파의 하나로서,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목욕하는 여인들(The Bathes)은 1887년 르느와르가 3년간의 실험 끝에 완성한 역작으로서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목욕하는 여인들을 자연과 함께 원근법을 무시하고 조화롭게 그려내었다. 1883년작 '목욕하는 여인'과 전체적인 구도, 즉 여성의 볼륨을 강조하고 밝고 화사한 색채를 사용한 것 등은 비슷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4명의 여성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목욕하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으며 자연을 보다 구체적으로 배경 처리하였다는 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필자가 이 그림을 통해서 말하려 하는 것은 이른바 '예술과 외설'의 논쟁이다. 어쩌면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누구도 이 작품을 두고 외설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1916년 김관호 화백이 일본에서 '해질 녘'이라는 작품으로 일본의 최고공모전에서 특선을 하였으나 신문에서는 그의 작품사진을 실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작품 속의 여인이 벌거벗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여인의 누드만으로도 외설성에 대한 시비를 하기에 충분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성기가 직접 노출되거나 성교장면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된 작품(대표적으로 미국의 제프 쿤스 등의 작품)을 오늘날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르느와르의 이 작품은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비해 여성의 풍만한 볼륨을 강조하였으며 그 몸짓 또한 매우 자연스러워서, 느르와르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의 미술평론가들마저도 이 작품은 '아른거리는 살색을 매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라고 한 바 있다. '만약 여자에게 유방과 엉덩이가 없었다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르느와르의 독백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는 누드화에서 풍만한 생명감과 여인의 은밀한 관능까지 살색으로 표현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 적어도 그 당시에는 생각하기에 따라 외설성 시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Ⅲ. 예술과 외설
예술과 외설의 논쟁이 법적 문제로까지 확대된 것은 마광수 교수의 '줄거운 사라'사건이다. 물론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으나(대표적으로 반노사건 등)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역시 이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이후로도 영화 '거짓말', '미술교사 김인규'사건 등이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외설'이란 단순개념으로 정의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유형화 또는 암시적인 추상화 등을 통하여 성적인 의미를 표현함으로써 정상인이 느끼게 되는 즐거움보다는 당혹감이나 혐오감을 주는 일종의 사회학의 유형'으로 정의할 수 있다.(임성택, 외설성에 관한 판례의 기독교 윤리적 해석)

외설은 법률용어가 아니며 형법에서는 이와 유사한 개념으로 '음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형법학자 유기천 교수는 '음란이란 용어는 독일 형법의 Unyucht의 번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구법시대에는 외설이라고 불렸다'라고 하였는바, 결국 우리나라에서는 외설의 법적 평가를 음란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외설의 구체적 기준에 대하여 미국의 판례들은 ①성에 관한 묘사나 표현 등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줄 때 ②전체로서의 내용을 고찰할 때 그 중심적인 경향이 독자로 하여금 호색적인 흥미를 자아내게 할 것 ③그것을 읽거나 보거나 듣는 자가 그에 대해 혐오감을 가질 것 ④문학적 예술적 가치 등과 같은 '보상할 만한 사회적 가치'가 전혀 없을 것 등을 제시하고 있다.(임성택) 한편 일본 최고재판소는 '음란성은 ①성묘사의 정도와 수법, ②성묘사가 전체문서 중에 차지하는 비중, ③문서의 사상과 성묘사의 관련성, ④예술·사상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의 완화도, ⑤ 그 구성과 전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라고 판시하였다.(1980.11.28, 일본최고재판소)

그러나 문제는 사람마다 '불쾌감', '혐오감', '호색적 흥미' 등을 느끼는 정도가 다를 것인데, 이 경우 누구를 기준으로 이러한 요소들을 판단해야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①사회 평균인의 수준에서 판단해야한다는 견해, ②제작자 또는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나 목적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견해 등이 대립하고 있으나, 주관설에 따를 경우 창작자의 창작의 자유는 보장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행위자의 주관적 의도를 파악하기가 곤란하다는 비판이 있어 판례의 태도는 사회평균인설을 따르고 있는 듯하다.

또 다른 문제로는 외설성을 판단함에 있어 특정의 묘사만을 그 대상으로 해야하는가 아니면 전체적인 작품과 관련지어서 판단해야하는가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대법원이 '음란성 여부는 작품의 전체적인 내용의 흐름을 더듬어 매듭짓는 데까지 고려하여 종합적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라고 판시한 바 있다.(74도1879판례)

결국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외설이란 '성적 묘사를 통하여 사회평균인으로 하여금 불쾌감, 혐오감, 호색적 흥미 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물론 부분적 표현은 이러한 요건에 해당되지만 전체적인 작품의 흐름상 이러한 성적 자극이 그 작품의 사상성으로 하여금 완화될 경우에는 외설이 아니다.

'예술과 외설'에 대한 법적 논의의 실익은 형법 제243조(음란한 문서, 그림, 필름 등의 판매·대여·전시 등에 대한 처벌), 제244조(음란한 문서 등의 제작 등의 처벌), 제245조(공연히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의 처벌) 등의 구성요건해당성을 판단하기 위함이다. 어떠한 작품이 예술로 평가를 받으면 이러한 형법의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않으므로 처벌을 받지 않지만 그 반대의 경우 즉 외설로 평가를 받으면 처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Ⅳ. 예술과 외설에 대한 필자의 생각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판례를 보더라도 결국 외설성의 판단은 일반인의 성적 수치심 내지는 불쾌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쾌감 등은 사람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또한 환경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하는 매우 유동적인 개념이다. 유동적인 개념에 대하여 구체적 기준을 설정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칼로 물을 베는 것이다. 외설에 대하여 형법이 관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독일의 판례는 '사회적 현실로서의 위험'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서 외설적 표현으로 인하여 이러한 현상이 사회에 그대로 현실적으로 나타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의 풍속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사이트에 흘러 다니는 수많은 포르노그라피들과 거리의 벽마다 붙어 있는 포스트들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외설'을 법적으로 통제하여 '사회적 현실화'를 막는 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오히려 창작을 구속하는 무기력한 굴레는 아닌가?

필자는 그을 수 없는 기준선을 그어서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고 또한 형법적으로 처벌하기보다는 지나치게 성적 묘사가 많거나 노골적인 성적 묘사가 있는 창작물 등에 대하여 미성년자의 접근을 막는 행정법상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필자의 논지는 적어도 예술과 외설에 대한 법적인 평가는 이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예술과 외설은 법적인 평가가 아닌 창작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맡기는 것이 옳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