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자화상

  • 7호
  • 기사입력 2002.03.31
  • 취재 기희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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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미술 serieslll 글 | 법학과 김민호 교수님
    
  
  
           

Ⅰ. 작품소개

      

고흐는 자신의 자화상을 즐겨 그렸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어려운 형편과 괴팍한 성격 탓에 모델을 구하기 어려웠던         것도 있고, 피폐해져만 가는 자신을 직면하고서 흩어지는 자아를 부여잡으려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고흐의 자화상 중에는         매우 특이한 자화상 두 점이 있다. 둘 다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인데 하나는 파이프를 물고 있다. 고흐가 생을 마감하기         1년 전인 1889년에 그린 작품이다.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은 붉은 색을 많이 사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광기와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반면에 파이프를 물지 않은         자화상은 밝은 톤을 사용하여 차분하면서도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당시 고흐의 내면이 얼마나 복잡하고 불안정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Ⅱ. 고흐의 생애

      

고흐의 삶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정신적 지주였던 동생 테오, 고흐 혼자 열렬히 짝사랑했던 하숙집 주인 딸 우르슐라와         사촌누이 케이, 그리고 후기인상주의의 거장이면서 동거자였던 고갱이었다. 이들과의 관계가 바로 고흐의 삶 전부였다.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브라반트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에 헤이그의 구필화랑에서 점원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훌륭한 작품들을 접하게 되고 미술적 소양을 갖게된다.             그러나 고흐 자신도 장차 화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우르슐라에게 실연을 당한 이후에는 인간적 애정에 환멸을             느끼고 종교에 귀의를 하려 하지만 이 역시 순탄치 않았다. 벨기에 남서부의 탄광 지역인 보리나주에서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교사업을 하였으나 앞뒤를 가리지 않는 순간적인 열정의 표출로 인하여 교단과 마찰을 일으키게 되어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등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단으로부터 전도사의 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인간과 신을 향한 열정에 대한 배신과 가진 것 하나 없는 쇠약한 자신의             모습 속에서 고흐는 더욱 고립된 삶을 영위한다. 동생 테오는 고흐가 광산 전도사 시절 취미 삼아 그렸던 스케치를 보고서             고흐에게 그림 공부를 해 볼 것을 권유한다. 동생의 강한 권유에 그림공부를 시작한 고흐는 삶을 마감할 때까지 불과 10여년만을             화가로서의 짧은 생을 산 것이다. 그나마 처음 4년은 그림을 배우는 정도였고 창작활동을 한 것은 겨우 6년정도에 불과하다.
            
          
                       
          
        
      
    
  
  
           

심신이 쇠약해지고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낀 고흐는 좀더 밝은 하늘 아래에서 강한 햇살에 투영되는 자연을 접하고 싶은 생각에 프랑스         남부의 아를르로 이주하여 열정적인 창작활동을 하게된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외로움은 창작의 열정만으로는 치유될 수가 없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자신과 평소 생각이 통하는 고갱을 아를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때 마침 고갱 역시         심신이 피곤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터라 테오의 도움으로 아를르에 있는 고흐의 집에 가게된다. 그러나 이들의 동거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너무나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들은 서로가 자신을 인정해 주기만을 바라고서 상대방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1888년 크리스마스 전날에 고흐는 심한 우울증으로 발작을 일으켜 자신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린다. 오랜 병원생활과 동생 테오에게         생계를 의존하는 데서 오는 죄의식, 그리고 성공하지 못한데 따른 열등감 때문에 그는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Ⅲ. 법적 단상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과 관련하여 얽힌 이야기가 많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왜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린 것일까? 정신분열로 인한 자해라고 하기도 하고, 자신의 자화상에 대해 고갱이 좋지 않은 평가를 한 것에 대해         화를 참지 못하여 자행한 행동이라고도 한다.

      
        
                       

또한 고갱이 그린 고흐의 초상을 고흐가 보고서 자신의 오른쪽 귀를 잘 못 그렸다고 고갱에게 화를 냈는데 그 것이               화근이 되어 고갱과 심하게 다투게 되고 이 때문에 자학증상을 보이면서 급기야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찌되었든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다. 자해를 한 것이다. 형법에서는 이처럼 자신의 신체에 자신이 스스로 침해를 가하는               것을 자손행위(自損行爲)라 한다. 자손행위는 자신의 법익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이므로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아 원칙적으로               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역법 제86조에서는 병역기피 목적의 자손행위는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고흐가 병역을 기피할               목적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할 뿐만 아니라 당시 고흐의 정신상태는 심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고 있었기에 비록 구성요건에               해당한다하여도 범죄책임능력이 없어서 처벌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흐는 잘린 귀를 가끔 다니던 술집의 웨이트리스 라셸에게 주었다고 한다.             선물인줄 알고 포장을 풀었는데 유혈이 낭자한 사람의 귀가 나왔을 때 여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분명 혐오감이 들었을 것이다.             타인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불안감을 주는 행위 자체만으로는 형법상 처벌규정이 없다. 경범죄처벌법 제1조 24호에서는 불안감             조성행위에 대하여 10만원이하의 벌금·구류·과료의 벌로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라셸이 그 귀를             받고서 두려움이나 불쾌감으로 인하여 불면증 또는 소화불량 등 정신적·신체적 고통을 받았다면 형법상 상해죄가 성립될 수도             있다.         
      
    
  
  
     고흐는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두 개의 너무나 대비되는 자화상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을 화폭에 표현해       내는 천재화가의 일면을 볼 수 있다는 사실과, 특히 파이프를 물지 않고 있는 자화상은 밝은 원색의 사용과 햇빛에 반사되는 강한 색감을       사용하여 후기인상주의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 등 미술사적 가치는 있으나, 솔직히 귀가 잘려 나간 초췌한 남자의 얼굴이       미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소재라고 생각된다. 헌법상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이념에 따라 현행법에서는 성적 불쾌감을       초래하는 외설적 표현과 국가보안법상 국가를 전복하려는 목적의 선동·선전의 표현을 제외하고는 창작의 자유를 최대한 인정하고 있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면서, 처참하게 버려진 외로운 인간의 영혼을 생각하는 철학적 상념이나, 강렬한 원색의 밝은 톤으로 화사함과 신비감까지       주는 미술적 감동을 얻기는커녕, 자화상 속에서 묻어 나오는 고흐의 행위가 법학적으로는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를 따져보고 있는 필자의       우매함은 법학자의 한계에서 비롯된 듯하여 씁쓸한 기분으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