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여성과 법-

  • 21호
  • 기사입력 200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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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미술 series 글 / 법학과 김민호 교수
Ⅰ. 프롤로그

가을이 깊다. 가을은 쓸쓸한 조락의 계절이 아닌 내일의 봄을 준비하는 결실의 계절이라는 어느 수필가의 억지스러운 위로에도 불구하고 가을의 허전함을 감추기가 어렵다. 미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법학자인 필자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인지 태평로 로댕갤러리를 찾았다. 가을을 핑계대면서 말이다. 작년에도 이만 때쯤 이 곳을 찾았는지라 ‘지옥의 문’ ‘깔레의 시민’은 그 때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을 뿐인데 오늘은 갑작스레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이라는 영화 속의 끌로델이 떠올랐다.

정신병원 병실에서 세상의 고뇌를 혼자 지고서 쓸쓸히 죽어가는 이자벨 아자니(영화에서 끌로델 역을 맡았던 배우)의 얼굴이 지옥의 문과 오버랩되었다. 실재로 지옥의 문에 조각된 지옥의 여인들 중에는 로댕이 까미유를 모델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욕심 하나만으로 다달이 ‘법과 미술’이라는 칼럼을 써가고 있는 필자는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20살부터 10여년간을 로댕과 동거하며 자신의 젊음, 미모, 재능 등 모든 것을 사랑과 함께 바친 여인! 영화 속에서 로댕은 오히려 그녀의 사랑을 이용해 그녀의 영감과 창작력을 훔치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사실과는 다른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이다. 영화평론가나 미술인들이 하나같이 순애보적인 사랑으로 묘사하는 이들의 관계를 법률적 시각으로 재평가하려는 필자의 모습 속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느낀다. 그러나 이왕에 이 글을 쓰기로 작정을 한 이상 독자들의 해량을 바라면서 나름대로 느낀 점을 쓰고자 한다.

Ⅱ. 까미유 끌로델의 생애와 로댕과의 사랑

까미유 끌로델은 1864년 프랑스 페레(Fere)에서 태어난다. 타고난 감성과 열정에 이끌려 데생이나 조각의 기초교육도 받은 적이 없음에도 그녀는 놀라운 상상력으로 나폴레옹 흉상, 비스마르크 흉상,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 기초한 조각 등을 만들었다. 그녀의 나이 16살이 되는 해에 조각가 알프레드 부쉐(Alfred Boucher)는 그녀에게 조각의 기초를 가르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까미유의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천부적 소질을 키워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그 이듬해 까미유는 알프레드의 소개로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라는 예술학교에 입학을 하려 한다. 그러나 당시 예술계는 여성에게 거의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았다. 예술학교는 까미유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입학을 거부한다. 또한 현실적으로도 조각 작업실의 문란한 분위기에 여성이 동참하기는 어려웠다. 까미유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조그만 사립학교에서 조각공부를 계속하였다.

로마로 떠나야 하는 알프레드는 20살의 까미유를 오귀스트 로댕에게 대신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파리를 떠나게 된다. 까미유와 로댕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로댕의 나이는 40살을 넘은 중년으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까미유의 천재적인 재능을 감탄한 로댕은 까미유에게 그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할 것을 제안한다. 로댕의 작업실에 젊은 여성의 등장은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20살이 넘는 나이차이와 사제라는 특수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로댕과 까미유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평범할 수가 없었다. 로댕에게는 ‘로즈’라는 연인이 있었으며,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서로에 대한 작품의 질투는 결코 남녀간의 애정으로는 보기가 힘들었다. 애증이 교차하는 미묘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로댕과의 관계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까미유는 이탈리아의 허름한 작업실에서 자신의 재능을 언젠가는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창작생활을 하였다. 까미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왈츠’와 ‘어린소녀 샤틀렌느’도 이 시기에 발표된 것이다. 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여성 조각가의 한계와 그녀의 내성적 성격때문이었다. 까미유와 로댕의 관계가 愛에서 憎으로 바뀐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까미유는 자신의 작품 ‘클로토’를 박물관에 전시하려 하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박물관에 전시되지 않았고 그 행방을 알 수도 없게 되었다. 까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영감을 도용한 것이 탄로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작품을 훔친 것이라고 굳게 믿었으며 공개적으로 로댕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 때부터 알 수 없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게 되었고,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어 30여년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1943년 80세로 병원에서 쓸쓸한 생을 마감한다.


Ⅲ. 여성과 법률

까미유 끌로델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예술학교의 입학이 거부되었고, 또한 남성 중심의 조각실 분위기 때문에 그녀의 작품세계를 충분히 펼칠 수 없었으며, 로댕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로는 비단 끌로델만이 받는 불이익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주주의 이념적 기초라 할 수 있는 1789년의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도 ‘여성’은 ‘인간’도 ‘시민’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법의 이념은 ‘평등’이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여성에게 법이 특별한 대우를 해서는 안 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남성과 대등한 지위에 서 있지 못할 때에는 법은 여성의 법적 지위를 특별히 보호함으로써 그 균형을 유지시켜야 한다. 그래야 평등의 저울이 균형을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여성과 법률’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현행법상 여성의 법적 지위를 특별히 보호하고 있는 법률로는 ‘여성발전기본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분야에서 여성을 보호하는 법률들이 존재한다. 우선 근로관계에서는 고용에 있어서 남녀의 평등한 기회보장과 대우를 규정하고 있으며, 도덕상? 보건상 유해? 위험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야간작업이나 휴일노동, 출산후 1년이 경과되지 않은 여성의 시간외근로 등을 제한하고 있다.

또한 산전산후 휴가보장, 육아시간 보장, 육아휴직 보장, 직장내 보육시설 설치, 여성근로자 복지시설 설치 등을 법률로써 강제하고 있다. 다음으로 가정 내 여성의 법적 보호를 위하여 가정폭력범죄에 대한 처벌 등을 강화하고, 이혼에 있어서도 재산의 분할이나 자녀의 양육에 대하여 여성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다. 또한 범죄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폭력범죄에 대해서는 엄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형사절차상 여성 피해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특별한 절차를 마련해 두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법률적 보호장치를 연구하다보면 오히려 자괴감을 느낀다. 여성이나 남성이나 성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지 ‘사람’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 왜 여성을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정도로 여성이 사회적 불이익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한편으로는 이러한 문제가 남성들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성들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동질성을 기초로 하여 양성의 평등을 인식하여야 한다. 피해의식을 전제로 하는 양성의 평등은 오히려 성적 대결이라는 가장 저급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여성’이기 때문에 보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당연한 보호를 주장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요즘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로부터 종종 푸념의 소리를 듣는다.

성희롱이란 애매한 문제 때문에 직장에서 직원들간의 관계가 멀어져 간다는 것이다. 성희롱을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였던 남성들의 의식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적 수취심을 유발시키는 것이 범죄라는 인식은 사회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때에 기계적인 잣대를 들이대면서 남성을 범죄자라로 몰아붙인다면 ‘인간’의 평등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양성’의 ‘대등한 대결이 고착화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불필요한 사족을 단 것 같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법이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여성이 존엄한 인격을 가지는 ‘인간’이기 때문이지, 남성과의 투쟁적 무기를 주기 위함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인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