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와 예술작품의 차이' - 마르셀 뒤샹의 다다이즘

  • 30호
  • 기사입력 2003.02.16
  • 취재 이명우 기자
  • 조회수 8535
글 : 법학과 김민호 교수
Ⅰ. 프롤로그

20세기 미술을 이해함에 있어 필자와 같이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아방가르드(Avant-garde)니 오브제(objet)니 하는 용어들이다.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와 닫지 않는 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아방가르드란 기성의 형식이나 전통을 부정하고 새로움과 미지의 세계를 추구하는 예술상의 혁명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며, 오브제란 미술에서 사물의 주제성을 배제하고 물체 그 자체를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장실 변기를 거꾸로 놓아둔 마르셀 뒤샹의 ‘샘물(Fountain)’이라는 작품을 아방가르드 또는 오브제라는 개념으로 해석은 할 수 있을지언정 솔직히 필자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는 순전히 필자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초현실주의에서 포스트 모던에 이르는 현대미술사에 획기적 전환점을 제시한 다다이즘과 다다이즘의 거장 마르셀 뒤샹에 대해 연구해 보기로 하였다.

Ⅱ. 다다이즘과 마르셀 뒤샹의 작품세계

1. 다다이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식인들은 인간(인류)과 그들이 만들어낸 문명에 대해 환멸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인류가 만들어낸 산업과 기계문명은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기는커녕 결국 인간을 파괴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러한 정서를 반영한 예술사조가 바로 다다이즘이다. ‘다다(dada)’는 프랑스어로 ‘어린이의 장난감 말’을 뜻한다. 이 명칭은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시인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가 국제 전위예술가 그룹의 회합장소였던 ‘볼테르’라는 카페에 증축한 갤러리에 붙인 명칭이라고 전해진다.

다다이즘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인간적인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절대시하던 기성의 관념을 부정하는 반 예술적, 탈 예술적 사조라고 할 수 있다. 다다이즘을 함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흔히들 차라의 말을 인용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 · 상징적인 복제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 직접 창조한다.’(출처, 두산동아대백과사전)

그래서 다다이즘은 기존의 심미적인 사물만을 고집하지 않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한 조형예술이 등장한 것이다.

2. 마르셀 뒤샹

다다이즘을 설명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55)이다. 프랑스 출신의 미국화가 뒤샹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이 그의 작품 ‘샘물’과 ‘레디메이드(ready made)’예술이다.

공증변호사인 부친 덕분에 부유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어릴 적부터 인상파에 매료되어 습작을 그렸으나, 이미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던 형들의 영향으로 큐비즘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아카데미 쥴리앙에서 정식 미술수업을 받은 그는, 이후 앙데팡당을 비롯한 파리의 작품전에 다른 큐비즘 화가들과 공동전시회를 열기도 한다. 이 때 그가 그린 작품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비교적 여인의 누드를 정확하게 묘사하면서 속도감을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큐비즘 화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냉담한 반응과는 달리 뉴욕에서는 대단한 인기를 얻게 된다. 이처럼 속도감을 통한 공간의 동시성을 표현하는 뒤샹의 기법은 상당기간 계속된다.

어느 날 뒤샹은 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하나 붙여 놓고 강한 영감을 얻게 된다.(1913년 작 자전거) 이후부터 뒤샹은 이른바 레디메이드에 매료된다. 기존에 존재하는 공산품을 본래의 기능에서 때어 내어 새로운 메시지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 중에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샘물’이다. 변기를 거꾸로 새워 놓은 작품이다. 오물을 물로 씻어 내는 변기의 본래기능을 부정하고 그저 물이 흘러내리는 ‘샘’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대미술의 향도를 밝힌 인물이라는 찬사에서부터 자신의 업적에 비해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인물이라는 비난까지 뒤샹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분분하다. 그러나 필자는 뒤샹의 예술관에 대해서는 매우 공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던 당시의 화단에 대하여 상당한 비판적 독설을 퍼부었다. ‘오늘날 화가들은 작품을 너무 쉽고 빠르게 만들어 버린다. 많은 미술판매상과 비평가들의 상업주의에 화가들이 결탁해 버린 것이다. 이전에는 예술가들의 삶이 빈곤하였고 이를 오히려 즐겨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술가는 팔기 위한 작품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고 있다.’(출처, http://www.kunsttrip.net/duchamp.htm)

Ⅲ. 엉뚱한 상상

아방가르드의 조형작품들을 보면서 필자는 다소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어느 미술대학의 교수가 변기나 고철을 이용한 조형작품을 제작하여 작품의뢰인에게 인도하기 전까지 학교운동장 공터에 임시로 두었다. 그런데 학교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이를 쓰레기로 오인하고 수거하여 쓰레기 적치장에 방치하였으며 마침 지나가던 고물상이 고철을 사겠노라 하여 이를 고철로 팔아서 그 돈으로 술을 마셨다. 이러한 경우 어떠한 법률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까?(이는 순전한 필자의 상상이 아니라 실지로 국내의 지방대학에서 발생한 적이 있는 사건이다)

필자가 이러한 가정을 한 것은 결코 다다이즘의 작품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다만 이러한 일이 있을 수도 있으며, 그런 경우의 법률적 상식에 대해 알아보자는 것뿐이다.

일반적으로 법률적 사건을 접할 때는 민사적 문제와 형사적 문제의 두 가지 측면에서 검토를 해 보아야 한다. 민사적 문제를 먼저 검토해 보자. 손해배상책임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피해자인 미술대학 교수는 가해자인 청소부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할 것이다. 당사자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민사법원에 소송이 제기되었다고 가정하자. 판사는 어떠한 판결을 해야할 것인가? 기해자가 작품을 훼손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손해배상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작품을 훼손함에 있어 가해자의 고의 또는 과실이 있어야 한다.

분명 고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실은 있는 것인가? 작품이 너무 난해하여 일반인이 보기에 작품인지 또는 폐기물인지가 불분명하였다면 청소부에게 중과실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물론 경고문이나 임시 울타리 등을 설치하였다면 중과실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 구내에 방치된 물건이므로 청소부가 이를 수거하기 전에 이 물건이 누구의 것이며 어떤 물건이라는 것을 확인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수거하였다는 점에서는 경과실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중과실이든 경과실이든 아무튼 과실을 인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배상금액의 산정이다. 화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가치를 요구할 것이며, 청소부는 고철로만 알았으므로 과연 얼마를 배상액으로 평가해야하는 것인가? 이 경우 일반적으로 배상액의 산정은 ‘객관적 가치’를 기준으로 한다. 물론 판사가 미술작품의 객관적 가치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럴 경우에는 미술전문가를 ‘감정인’으로 위촉하여 감정가치를 묻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소송과정을 거쳐 배상액이 평가된다할지라도 작품의 훼손을 스스로 방지해야 하는 미술가 자신의 책임도 있기 때문에 ‘과실상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결국 손해발생액의 몇 %를 인정할 것인가는 판사가 결정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형사적 문제이다. 우선 가정해 볼 수 있는 범죄로는 ‘재물손괴죄’와 ‘절도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손괴죄는 고의가 있는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을 쓰레기로 오인한 청소부의 과실에 기초한 손괴는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절도죄는 구성이 가능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절도죄는 미술작품이라는 인식이 없어도 고철이라는 경제적 가치에 대한 인식만 있으면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철을 팔아서 자신이 사용하였다는 것은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판사가 판단하기에 따라서는 처벌이 어려울 수도 있다.

결국 예술작품을 쓰레기로 오인한 청소부의 무지를 탓하기 전에 자신의 작품은 스스로 보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예술작품의 경우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산권은 스스로 보호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글을 맺는다.

편집 | 스큐진 이명우 기자(imssi20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