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입은 마하, 옷 벗은 마하

  • 36호
  • 기사입력 2003.05.15
  • 조회수 7915
글 : 법학과 김민호 교수

Ⅰ. 프롤로그

지난 2003년 2월 8일 도쿄에서는 고흐의 그림이 6600만엔이라는 거액에 경매시장에서 팔렸다. 그런데 이 그림은 원래 ‘작자미상의 부인상’이란 이름으로 경매 주최측이 경매예상가 1만엔에 출품하려고 했었던 것이었으나 고흐미술관의 감정 결과 고흐의 진품임이 밝혀지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1만엔짜리가 6600만엔이 된 것이다. 미술 감정의 위력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불현 듯 고흐의 작품이 아닌 고야의 ‘옷 벗은 마하’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생활 속에 크게 의식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좀 더 관심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이나 건물의 로비 등에서 유명화가의 그림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물론 모조품들이다. 보는 이들은 누구나 그것이 모조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고야의 작품 ‘옷 벗은 마하’는 학창시절의 미술교과서나 심지어 허름한 선술집에서도 자주 눈에 띠는 그림 중에 하나다. 누구의 작품인지, 그 제목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을 법한 장소에 그저 인테리어의 하나로 덩그러니 걸려 있는 그림들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그림이 진품이라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달라질까? 그 그림이 주는 감동에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이 번에 필자는 낭만주의와 고야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서양 미술이라고 하면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낭만주의 그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는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 감정일 뿐 결코 낭만주의가 서양미술을 대표한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튼 이 참에 필자는 낭만주의 미술과 고야의 미술세계를 살펴보면서, 아울러 잘 못된 또는 허위의 미술감정으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법적 문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낭만주의와 고야

1. 낭만주의

낭만주의 문학과 낭만주의 미술은 다른 사조들과 달리 어떠한 특징적 문예사조라기 보다는 작가의 정신상태를 일컫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창작자의 내면적 의식세계가 낭만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낭만’이란 무엇인가? ‘낭만’의 사전적(辭典的) 의미는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더 아름다운 미래를 지향하는 이상적?낙천적인 상태’라고 국어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결국 낭만주의란 문예창작자의 정신이 낭만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낭만주의라고 하는 것은 19세기초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적 문예사조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낭만주의란 이성적 질서와 균형 잡힌 형식미를 존중하던 고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정열적 자아의 해방, 민족적?지방적 전통에의 복귀, 자연에 대한 사랑, 명상적 신비주의, 이국에 대한 미지적 동경 등을 통하여 창작자의 상상력을 추구하는 문예사조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낭만주의 미술은 기법과 양식에 있어서의 통일성을 갖지는 못하였다. 형식보다는 표현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서양 근대미술사의 시작은 르네상스가 아니라 낭만주의라고 생각한다. 미술의 원래 사명은 표현이다. 그 것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표현한 것이든, 또는 창작자의 내면적 의식세계를 표현한 것이든, 아니면 무언가의 메시지를 표현한 것이든 어찌 되었던 표현을 하는 것이 미술이다. 기법과 양식은 표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필자는 낭만주의를 서양 근대미술의 출발점이며, 서양 근대 및 현대 미술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낭만주의는 사실주의나 상징주의에 영향을 주고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되는 여러 미술사조들 속에 녹아들어 있는 일관된 정신인 것이다. 물론 순전히 필자의 개인적 생각일 뿐이다.

굳이 낭만주의의 양식적 공통점을 찾는다면, 경직된 선과 정돈된 형태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것(그것이 아름다운 것이든 또는 추한 것이든)을 산뜻하고 강렬한 색채로서 표현하였다는 것과, 유토피아?꿈?풍경?동화?민족의식 등을 즐겨 그렸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화가와 작품으로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년 7월 28일)’,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 밀레의 ‘만종’, 고야의 ‘옷 벗은 마하’ 등이 있다.

2. 고야

고야(Farancisco Goya)는 고집스럽게도 인물화만을 그렸다. 처음에는 로코코 스타일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낭만주의 정서(권력의 허망함이나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경향)를 투영시킨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너무나 유명한 마하(Maja)의 그림 역시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농부?대장장이?투우사?의사?도자기 파는 사람 등과 같이 일하는 사람도 그렸고, 젊은 처자?귀족 부인?마하 등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들도 그렸으며, 성서의 성인이나 전설에 나오는 거인들도 그렸다. 물론 자신의 자화상도 즐겨 그렸다. 왜 고야는 인물화에 집착하였을까? 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그 이유를 밝힌 자료를 찾지는 못하였다. 아마도 고야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미술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마치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신 것처럼 말이다. 너무나 황당하고 거창한 해석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고야는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예쁜 사람, 잔인한 사람, 추잡한 사람, 심지어는 마녀들까지도 그렷다.
그의 귀를 멀게 했던 중병을 앓고 난 후부터 그는 악마주의에 매료되었다. 신비롭고 청순한 에스파냐의 고전적 이미지인 ‘마하’를 관능적 이미지로 바꾸어 버린 것도 이러한 그의 내적 심리상태를 반영하고 있다. 필자 역시 이러한 배경을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옷을 입은 마하’와 ‘옷을 벗은 마하’의 그림에서 고야의 악마적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였다.
고야의 작품 세계에 또 다른 영향을 준 것은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일어난 민족의식이었다. ‘1808년 5월 3일’은 그의 이러한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특히 훗날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Ⅲ. 잘못된 또는 허위의 미술감정에 대한 법적 책임

미술감정을 잘 못하였다는 사실만으로 법적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미술감정인이라는 국가 공인 자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자격자가 미술을 감정하였다고 이를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자신이 미술감정에 조회가 깊은 것처럼 상대방을 속여서 미술감정을 하고 감정료를 받았다면 형법상 사기죄가 성립될 수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보다는 미술품거래를 위하여 진위 및 시가 등의 감정을 의뢰하였는데, 감정인의 감정이 잘 못되어 매수인이 손해를 본 경우, 또는 미술품의 매도인과 공모하여 감정인이 허위의 감정을 함으로써 매수인이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경우 등이 보다 일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일들이다.
경우를 나누어 살펴보면, 우선 감정인의 감정 오인으로 매수인이 손해를 입은 경우에는 감정인에게 형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다만 민사상 감정계약(법적으로는 위임계약에 해당할 것이다)의 불성실한 계약이행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이나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책임 등이 발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는 계약당시에 잘 못된 감정에 따른 감정인의 손해배상에 대하여 미리 약정을 해 두지 않았다면 그 책임을 묻기가 어렵다. 또한 후자의 손해배상책임도 고의가 없으므로 감정인에게 과실책임을 지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판례는 일반업무상의 과실에 대하여 과실책임을 매우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경향이다. 의사가 오진을 하였다고 하여 바로 의사에게 과실책임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판례의 태도이다.(대법원, 72다2319) 또한 어렵게 감정인의 과실책임을 인정한다할지라도 자신의 재산은 자신이 지켜야하는 까닭에 감정인의 감정만을 믿고 보다 신중한 판단을 하지 아니한 매수인 자신의 피해자과실이 인정될 가능성이 커서 결국 손해배상을 받기가 쉽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으로 매도인과 공모하여 감정인이 고의로 허위의 감정을 하여 매수인에게 손해를 발생케 한 경우를 살펴보자. 우선 형법상 사기죄가 구성될 수 있다. 또한 이 경우에는 과실에 의한 침해가 아닌 고의에 의한 침해에 해당하여 감정인의 손해배상책임을 비교적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진품을 가려내는 것이 중요할 수는 있다. 위작을 방지하고, 미술품 거래시장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술감정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미술품을 예술작품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재산적 가치로 평가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항간에는 작가가 죽어야 작품의 가격이 오른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명제처럼 회자되고 있다. 죽은 자의 작품에 가치가 오른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보다는 장래성이 있는 신인 작가가 창조적 활동에 더욱 매진할 수 있도록 이들의 작품을 사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보다 중요한 것은 아닐까? 유명화가의 진품을 가지고 있다는 저급한 심미안보다는 가능성 있는 신인작가를 발굴하여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수준 높은 심미안을 가지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편집 ㅣ 스큐진 박하늘 기자 (liebehimme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