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과 법'

  • 42호
  • 기사입력 2003.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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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자살에 대한 상반된 두 입장

다시 또 자살이 문제되고 있습니다. 생활고나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사건들이 매일같이 신문의 사회면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전교조와 갈등관계에 있었던 한 초등학교교장이 목을 매어 자살한 사건을 두고 사회가 떠들썩하더니, 홍콩의 인기 배우 장국영씨가 호텔의 24층에서 투신 자살을 하여 그의 자살 이유에 대해 세간의 궁금증을 증폭시켰습니다. 며칠전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총수인 정몽헌씨가 투신 자살하는 일이 벌어져 '정치적 타살'이니 하는 말들까지 회자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살이란 그 원인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당사자가 자유의사에 의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는 행위를 말합니다. 자살자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그의 실존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므로 자살자 개인에 대해서 실정법은 어떤 형태로든지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죽은 자에 대해서 다시 처벌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겠지만(그러나 중세에는 자살도 살인죄의 일종으로서 자살자의 사체에 대해 불명예스러운 매장을 하였습니다), 자살은 그 자체가 자기의 생명에 대한 자기 자신의 처분행위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비난할 수 없는 측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에 대한 태도는 윤리관과 종교관에 따라 극명한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살긍정론자는, 인간은 누구든지 자기의 생명에 관해서 절대적인 권리를 가진다는 윤리적 입장에서 긍정해 왔습니다. 종교적 관습으로서도 인도의 사티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남편을 잃은 아내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여 뒤따라 자살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살부정론자는, 자살은 신과 국왕에 대한 의무를 포기하는 행위로서 비난하였는데, 특히 개신교에서 자살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 하여 이를 죄악시하고, 종교적 제재를 가하였고 가톨릭에서는 오늘날에도 자살을 죄악시하는 사상이 강합니다. 불교에서도 종교자살이 없지 않지만 열반사상의 입장에서 자살을 경계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Ⅱ. 자살의 배후에 대한 법적 책임

그런데 크고 작은 사건들에서 등장하는 자살의 유형을 보면 그것이 반드시 당사자의 자유의사의 실현이라고 볼 수 없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살자의 자유의사의 실현이 아닌 경우라면 그 자유의사에 영향을 미친 원인의 강약에 따라 법의 개입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만약에 어느 보수주의자의 말처럼 "자살배후는 전교조이고 전교조 배후는 김정일이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전교조의 관련당사자는 과연 어떠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될까요?

실제로 자살의 배후가 문제되어 법정공방까지 갔고 마침내 그 배후자로 지목된 자가 형사처벌 받은 일까지 있었습니다. 1991년 5월에 있었던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자살 사건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 이후 김기설씨의 자살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살의 배후세력의 존재여부가 정치적으로 이슈화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는 한 대학 총장(앞에서 전교조 배후세력을 운운한 보수주의자가 바로 동일인입니다)의 발언을 시발로 공안 정국의 한파가 몰아 닥쳤습니다. 그 이후 사망한 자의 '유서를 대필해 주었다'는 혐의를 받은 강기훈씨가 형법상 자살방조죄(형법 제252조 제2항)에 의해 처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자살자는 처벌받지 않지만, 이미 자살할 결의를 하고 있는 자에게 자살을 용이하게 하도록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자는 자살방조죄로 처벌하는 것이 우리 나라 형법의 태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살할 마음이 없는 사람을 부추키는 등의 방법으로 자살할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는 자살교사죄(형법 제252조 제2항)로 처벌됩니다. 따라서 만약 사랑하는 두 남녀가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친 난관을 이겨내지 못하고 함께 음독자살하기로 하였다가 한 사람은 사망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 남았을 경우 형법은 그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는 무관하게 그 살아남은 자에 대해 자살교사죄나 자살방조죄의 책임을 묻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부탁이나 동의하에 그를 먼저 죽인 후 자기도 뒤따라 죽으려고 하다가 자신은 용기가 없어서 죽지 못하였거나 실행에 옮긴 후에도 살아남게 되었다면 형법상 촉탁살인죄 혹은 승낙살인죄(형법 제252조 제1항)의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생활고를 비관한 어머니가 4세나 6세 되는 어린아이를 함께 죽자고 하여 한강에 빠져 죽으려고 하다가 자식들은 사망하고 그 어머니만 구조되었다면 그 어머니는 어떻게 될까요? 이 경우 그 어머니는 자살교사죄로 처벌되는 것이 아니라 형법의 살인죄(형법 제250조 제1항)로 처벌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살방조나 자살교사는 자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에 대해 자살을 교사하거나 방조한 경우를 의미하는데, 4세나 6세된 아이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살인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자살자 때문에 그와 관계되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거기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가 있는지도 문제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 여교사의 자살이 사회문제화 되자 한나라당에서는 '교사 자살 금지법'을 만들기 위한 시도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자살의 개인적·사회적 원인을 찾아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정책을 만드는 일은 뒷전이고 돈안들이고 손쉽게 만든 법으로 자살을 막을 수 있다는 발상은 우습게 들립니다. 하지만 외국의 경우는 교사자살로 인한 학생의 정신적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을 끝까지 묻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에서 자살자의 자살로 남은 유족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군복무 중 선임병들의 가혹행위 등으로 군생활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고 자살에 이른 경우에는 국가를 상대로 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고 실제로 얼마전 서울고법에서는 "국가는 4400만원을 지급하라”판결을 선고한 바 있습니다.
생전에 생명보험에 가입하고 있었던 자가 정신질환상태에서 충동적인 행위에 의해 자살을 한 경우에도 남은 유족은 보험금 지급청구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험회사가 자살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책임을 면하기 위하여는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친 사실을 입증하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험계약자측이 정신질환상태에서의 충동적인 행위에 의한 사망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면 보험자는 피보험자가 정신질환상태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 또는 정신질환상태와 사망과는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아니한다는 사실을 객관적인 물증의 존재 내지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만큼의 명백한 주위 정황사실을 통하여 입증하여야 합니다.

자살하는 자가 '억울해서 목숨을 끊어서라도 자신의 무고함을 밝힌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기면,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재판의 사실규명 절차가 더 신중해질 수 있게 하는 효과도 생깁니다. 그렇지만 자살이 진실을 밝히는 도화선이 되기도 하지만, 자살을 통해 진실이 영원히 은폐되기도 합니다. 자살자가 남긴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비록 몇십년 전이긴 하지만, 오휘웅이라는 사람이 살인죄로 사형을 당하였는데, 그 살인사건의 피고인 중의 한사람이 오휘웅에게 죄를 떠 넘기면서 자신은 억울하다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교도소에서 자살을 하자, 재판부는 오휘웅의 유죄를 인정하면서 "새, 죽을 때 그 목소리 아름답고, 사람, 죽을 때 그 말 참되다"는 말을 판결문에 남긴 웃지 못할 일도 있었습니다.


Ⅲ. 자살할 권리와 안락사의 허용여부

만약 자살자의 개인적인 자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자살미수자에 대해서는 형사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처분하려고 한 일에 대해 우리나라의 실정법상 처벌하는 규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 개인의 생명은 그 개인의 다른 소유물처럼 스스로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생명에 관한 한 생명권자 스스로의 의사자유에 의해 그 생명을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다면, 자살에 대한 개인의 권리가 인정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생각을 그대로 밀고 나가면, 자살하는 자는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는 것이고 따라서 자살자를 도와주는 것은 타인의 '권리'실현에 도움을 주는 행위이므로 자살방조 등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법의 태도가 모순된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오늘날 이른바 '안락사허용론'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안락사란 말 그대로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뜻인데, 불치의 병에 걸린 사기에 임박한 자가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육체적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그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생명을 단축시키는 의료적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안락사에는 의사가 환자에 대해 더 이상의 치료행위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와 환자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의사에게 자신을 생명을 단절시켜 달라는 부탁을 하고 이에 의사가 환자의 자살행위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경우인 '적극적 안락사'가 있습니다.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서 형법학자들은 앞에서 말한 '몇 가지 조건'하에서 그 환자에 대해 의료적 시술행위를 중단하여 죽게 내버려두는 행위가 살인죄의 구성요건해당성을 충족시키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통념상 용납될 수 있는 행위라는 생각 하에서 그 행위의 위법성을 조각시키는 행위가 된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이른바 적극적 안락사의 경우는 의사가 환자를 능동적으로 살해하는 행위이므로 형법상의 촉탁·승낙살인죄나 자살교사·방조죄로 처벌되는 것을 면하게 할 수 없다는 태도가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적극적 안락사 반대론의 태도는 생명절대사상에 토대를 두고 생명은 다른 개인의 소유물처럼 한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의 공유물이라는 사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자살은 그것이 비록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시각이 여기에 깔려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만약에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한다면, 경제논리나 공리주의사상 등에 입각하여 약자의 생명이 희생될 수 있는 틈새가 생길 수 있으므로 인간의 생명을 개인의 임의처분에 맡겨둘 수 없다는 이유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에 따르면 스스로 자살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자가 자살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생명처분권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으나, 손발을 움직일 수도 없어 스스로 자살할 수조차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그 고통을 감내하면서 비참한 상태를 계속하라는 취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상태에 빠진 자를 도와주는 행위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형사책임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살의 가능성 혹은 자살을 할 자유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유를 발견한 하이데거나 샤르트르와 같은 실존주의적 철학자들의 주장이 오늘날 다시 무게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Ⅳ. 생명절대사상의 명암

인간의 생명은 신이 내려준 선물이므로 이를 인간이 스스로 거둘 수 없는 것이라는 종교적 사고나, 자살은 국왕에 대한 의무를 포기하는 것이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사고 혹은 자살은 자연의 섭리에 반하기 때문에 허용되지 않는다는 기계론적 자연관은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 이미 그 타당성을 상실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생명절대사상은 개인의 생명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통하여 인간 전체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보면 의미있고 가치있는 사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에 의한 생명처분권을 맡길 수 없다는 이른바 생명절대사상을 지키는 태도를 유지하려면 사형제도도 폐지하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국가가 범죄자의 생명을 빼앗는 사형제도는 생명절대사상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죽고 싶지 않는 자의 생명도 빼앗는 법이 죽고 싶은 자를 죽지 못하게 하는 것 역시 모순입니다.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로 이르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머나먼 땅 이라크에서 종교적 신념과 침입자에 대한 분노로 폭탄을 둘러메고 미군들에게 뛰어드는 임신부의 자살이건, 우리 땅에서 과도한 빚에 몰리다 못해 죽음을 선택하는 채무자의 자살이건 간에 자살은 한 인간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택하는 최후의 방법일 것입니다. 이러한 고뇌에 찬 개인의 선택행위에 대해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혹은 종교적인 도그마를 가지고 비난을 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지구상의 대부분의 국가의 법은 자살자에 대해서 처벌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영국에서는 1961년에 와서야 비로소 자살을 범죄로 처벌하는 일을 포기하게 되었지만, 자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네덜란드, 미국의 오렌곤주 등에서는 적극적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자살권을 인정하려는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계속 확산되려는 추세에 있습니다. 법은 그 사회의 문화나 역사 그리고 그 사회구성원의 의식의 반영입니다. 우리나라의 시민들이 자살에 대해 그리고 개인의 생명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자살에 대한 법의 개입의 정도, 적극적 안락사의 허용여부, 그리고 나아가서는 사형제도에 대한 존폐여부도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입법자가 결단하기에 매우 어려운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Ⅴ. 나오면서

세사람이 무인도에 있습니다. 그곳에는 감금된 포로와 그를 고문하는 고문자와 고문자의 부하인 '나'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고 어느 누구도 그 섬을 방문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포로가 탈출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포로는 극한적인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는 고문을 매 시간당 50분씩 당하고 있습니다. 벌써 그렇게 고문을 당한 지 1주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1주일간 동일한 형태의 고문을 당한 후에 죽임을 당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도 그를 구해낼 수 있는 처지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포로는 나에게 제발 죽여달라는 부탁을 간절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의 자살을 도와주는 것이 범죄행위일까요 아니면 그에 대한 구원일까요?


글 | 법과대학 김성돈 교수
편집 | 스큐진 이명우 기자(imssi20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