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이야기'

  • 43호
  • 기사입력 200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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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판사에 관한 이모저모

최근 대법관 선임문제를 둘러싸고 전국의 판사 150여명이 '인터넷 연판장'에 서명에 '연공서열 위주의 대법관 선임문제'를 지적하며 사법개혁을 촉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판사, 그 중에서 대법관은 그 임명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떠들썩할 만큼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입니다. 판사는 법률실무를 담당하는 대표적인 직역으로서 검사, 변호사 등과 함께 법조삼륜(法曹三輪) 가운데 하나의 바퀴에 해당하며, 헌법상 사법권을 행사하는 국가기관으로서 '법관'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사법권은 구체적인 사건에 있어서 당해 법률 또는 법률조항의 의미·내용과 적용범위가 어떠한 것인지를 정하는 권한, 즉 구체적인 법령의 해석과 적용권한을 말합니다.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의 권한입니다. 사법권은 특히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주고,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기 때문에 모든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행정업무와 재판업무가 분화되지 않아서 중앙과 지방의 행정관리가 재판업무까지 담당하였습니다. 소위 '원님재판'이라는 말이 그와 같은 상황을 말해줍니다. 그러다가 1895년 갑오개혁 후에 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이 제정되어 재판업무와 행정업무가 분리되고 이때부터 비로소 근대사법의 기본원칙이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헌법상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있고, 전국의 5곳에 고등법원이 있으며, 13곳에 지방법원이 있으며 지방법원 산하에 43곳의 지원이 있으며, 103개의 시군법원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전문법원으로서 가정법원, 행정법원 그리고 특허법원이 있습니다.
법적 분쟁에 대해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법관은 그 역할의 중대함 때문에 헌법과 법률에 의해 신분이 엄격히 보장되어 있습니다. 헌법 제101조 제3항은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법원조직법은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의 소정 과정을 마친 자와 변호사의 자격이 있는 자에 대하여 법관의 자격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합니다. 주목할 것은 2000년 2월 국회법이 개정되어 인사청문회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의 경우 국회의 동의에 앞서 국회에서 인사청문절차를 거치게 되었습니다. 판사는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합니다. 판사를 신규 임용하는 경우에는 2년의 기간 예비판사로 임용하여 근무하게 한 후 그 근무성적을 참작하여 판사로 임용합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포함한 법관의 정원은 1,888명이고(대법관은 대법원장을 포함해서 14명입니다), 사법연수원 교수 등 정원외 법관까지 포함한 현원은 1,688명입니다(2003. 2. 29.현재). 각급법원 판사 등 정원법에 의해 2003년에 80명이 증원되었고 2004년부터 2005년까지 2년에 걸쳐 100인씩 각각 증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Ⅱ. 신이여, 도와주소서

판사가 하는 가장 주된 업무는 재판에서 법을 적용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법이 적용될 '사실'을 확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실이 확정되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법을 적용할 수 없는데, 과거에 발생한 사실을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다시금 재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 일은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특히 민사재판의 원고나 피고, 형사재판의 검사나 피고인은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을 사실을 몰고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로 확인되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개념의 한 정의을 음미해 봄직 합니다: "사실이란 무엇인가? 사실이란 '사실적'이기 위해서 무엇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힘을 가진 자들의 작업의 산물이고, 그러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서 주어진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들의 어쩔 수 없음의 결과물이다"("What are facts? 'Facts' are products of the work of those have a power to define what is to be taken to be 'factual' and of the willinglessness of those have no such power and to accept the given fact").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재판과정에서 확정되는 사실은 실제로 발생한 사실, 즉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재구성된 사실, 혹은 짜맞추어진 사실이 그대로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사실확인절차를 합리화하여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예컨대 살인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는 수사기관인 경찰관과 검사는 총력을 다해 범인을 밝혀내고 증거를 수집하는데, 이때 수사기관이 해서는 안 되는 사실확인방법과 허용되는 사실확인방법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는 범인에 대해 그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여 그 사건이 형사재판에 회부되면 검사가 주장하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으로 몰린 피고인이나 그의 변호인은 항변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검사나 변호인이 내세우는 증인의 의견을 청취하기도 합니다.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위증죄도 존재하며, 법정에서 제출되는 여러 증거들이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갖가지 엄격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발생한 사건의 진위여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자는 바로 판사입니다. 판사는 여기서 법적으로 적법한 절차를 거친 증거라도 주관적으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자유심증주의). 개인사적인 일이나 굵직한 정치적인 사건 혹은 역사적인 많은 일들에 대해 그 진위를 가려 실제로 발생한 사실만을 사실로서 확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는 판사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판사는 신의 역할을 대행하는 자라고도 합니다. 미국변호사협회는 변호사이건 판사이건 검사이건 이 협회에 가입하려면 입회선서를 해야 하는데, 그 선서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신이여, 도와 주시옵소서"로 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Ⅲ. 시민이 하는 판사의 역할

하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 우수한 실무교육을 받았다는 점과, '법률'이 아닌 '사실'문제에 대해 올바른 지식과 판단력을 갖추는 일은 별개의 일입니다. 판사는 법률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사실문제에 대해서는 교육받고 공부한 바가 없습니다. 법과대학에서도 법률지식을 주로 공부하고, 사법시험에서도 이 법률지식을 테스트하는 일이 주된 일입니다. 하지만 법률을 해석하여 적용하기에 앞서 확정되어야 할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면, 판사가 적용하는 법률은 잘못된 법률이고, 그로 인해 사건의 당사자들이 입는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판사를 위시한 법률가에 대한 인상은 해방 후 상당한 동경과 선망에서부터 근년에 급격히 비판적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라는 다른 법조의 두 직역에 비해 비교적 부정적인 이미지가 덜 채색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법률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이 앞서 판사가 감당해야 할 사실확인의 어려움과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그리고 판사의 막중한 임무를 생각해 볼 때 판사는 아무나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습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입시위주의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거치고 법과대학에 입학한 후, 사회의 다양한 현상과 변화와는 거리를 유지한 채 사법시험에만 매진합니다. 전국 법과대학 입학정원이 약 7,000명 정도인데, 한해에 사법시험에서는 1,000명을 합격자로 선발합니다. 이 시험의 주된 과목은 1차시험에서 영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법학과목입니다. 사법시험과목에 법학과목은 모두가 각 법률에 대한 해석에 관한 지식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법률지식의 측정과정에서 선발되는 사람들은 일정한 법률전문가로 취급받게 됩니다. 법률전문가란 의료전문가인 의사, 제약 및 약학전문가인 약사 등과 마찬가지로 법률분야의 전문지식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선발된 사람들은 2년간의 판사나 검사로 임용받기 위해 다시 또 치열한 순위경쟁을 한 후 성적상 상위그룹에 있는 20대나 30대의 연령에 해당하는 자가 판사로 임용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재판과정에서 '사실확인'작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할 때 무리가 뒤따른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이들이 판사나 검사로서 오랜 실무경험중에 경륜과 연륜을 갖추게 되면 상당수가 변호사로 개업하게 되고, 이 노련한 변호사들이 사실확인의 열쇠를 쥐고 있는 판사초년생들과 어떠한 구도속에 놓이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판사제도에 많은 의구심이 일어납니다. '전관예우'니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우리사회에서 결코 근거 없는 입소문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판사가 되기 위하여는 먼저 수년간 변호사업무에 종사한 경험이 있어야 하는 영미식의 제도가 오늘날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훌륭한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법전의 법 이전에 현실의 사실을 현명하게 분석하고 해명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는 것을 법적 소양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다시 말해 세상살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안목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법적 문제는 어떤 사실에 대한 인간의 문제이자 인생의 문제입니다. 유죄냐 무죄냐 하는 것은 법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양심, 인생의 태도 문제로 환원될 경우가 많습니다. 재판이란 기본적으로 사실을 다투는데 있지 그 법률적 적용에 있는 건 아닙니다. 사실문제에 대한 판단이 99%라면 법률문제에 대한 판단의 여지는 1%밖에 안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문제의 전문가로 길러지지 않은 판사의 역할을 보충하고 사법의 민주화를 이뤄내기 위한 일환으로서 배심제도나 참심제도 등 시민재판의 도입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고 있는 현상도 보입니다. 시민재판이란 주권자인 국민이 직접 재판하거나 재판에 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헌법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나온다고 하고 있는데, 국민이 선출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입법부, 국민의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와는 달리 국민의 의사와 무관하게 구성되는 사법부의 최대 약점은 민주적 정당성의 결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민이 직접 사실확인절차를 주도하는 배심제도와 시민이 이 절차에 전문법관과 함께 관여하는 참심제 등 시민재판의 전형들이 민주적 정당성이라는 사법부의 취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장치로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참심제는 독일이나 프랑스 등에서 시행되고 있고, 배심제는 특히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아일랜드, 뉴질랜드에서 도입되어 있습니다. 최근 스페인과 러시아가 배심제를 도입했고, 덴마크, 오스트리아, 벨기에, 노르웨이도 변형된 배심제를 운영하고 있어서 배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50여개국에 달한다고 합니다. 일본은 1928년부터 배심 재판을 시작했다가 전쟁이 터지자 1943년 특별법으로 시행을 일시 중단했고, 10월 1일은 일본에서 법의 날인데, 이날은 바로 최초로 배심 재판이 시작된 날을 기념하고 있는 날이라고 합니다. 특히 시민재판제도는 법률적용의 문제에 앞서 사실확인의 문제에 시민이 관여한다는 점에서 보면, 법률전문지식이 없는 일반 시민에게 어떻게 재판을 맡기느냐는 하는 의문도 상당부분 해소될 수 있고, 시민재판의 신뢰성을 담보해 주는 여러 가지 통계자료도 나와 있습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우리 대법원도 사법개혁의 과제로서 배심 재판 또는 그와 유사한 재판 제도의 도입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Ⅳ. 판사들이 더 해야 할 공부

"우리나라 판사들이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좀 알아야 판결도 제대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올해 7월 12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23부가 2000년 초를 뜨겁게 달궜던 총선시민연대의 지도부에 '유죄' 판결을 내린 데에 대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운동가인 박원순 변호사가 내뱉은 말입니다. 특히 이 판결은 법원이 '유권자 운동'에 대해 '현행' 선거법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률이 그 사회의 제반 갈등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을 하는데, 그 법률은 갈등상황을 해결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법률은 건설현장에 그대로 주입하면 되는 레미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적용자의 철학이나 가치인식에 따라 적절하게 해석되어야 적용될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 법률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 철학적 문화적 맥락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법률적용자는 법률을 대신하여 말하는 입 혹은 자동판매기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철학에 따라 법률을 새롭게 해석해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판사는 역사의식도 가져야 하고, 뚜렷한 세계관도 가져야 하며, 우리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나름의 평가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선량한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평균적인 정서를 따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법과대학의 초년생부터 이러한 분야에 대한 기본지식을 습득하는 일과 무관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오늘날 법과대학의 파행적인 법학교육은 많은 개혁가들로부터 비판의 십자포화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의 법과대학생들은 1학년때부터 법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고등학교때 암기식 위주의 공부를 그대로 답습합니다. 정답찾기 공부방법론을 고수하면서 언제나 하나의 답을 찾기 위해 폭넓은 정신세계를 함양할 여유를 찾지 못합니다. 철학책이나 논리학책은 고사하고 소설읽기 조차 멀리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오로지 법률과목에만 목숨을 걸어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전공을 불문하고 고시에 매달리는 대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어 대학의 고시촌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 로스쿨 제도의 도입문제등 법학교육제도의 개선방안이 최근 다시 뜨겁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실로 다행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글| 법과대학 김성돈 교수
편집| 스큐진 이명우 기자(imssi20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