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하는 재판'

  • 49호
  • 기사입력 200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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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보십시요. 여러분 중의 누군가가 어떤 형사사건에 대한 재판업무를 수행하는 명예법관으로 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게 되는 것을".

시민의 사법참여

어느 날 여러분 중의 누군가가 몇월 몇일에 서울지방법원에 출석하여 어떤 사건에 대한 재판업무를 수행하라는 내용의 통지서를 받는다는 것을 상상 해 보십시오. 최근 우리 대법원이 사법개혁방안의 일환으로 고려하고 있는 배심제도나 참심제도가 도입되면 그러한 상상은 더 이상 상상 속의 일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배심제도는 영미에서 발달한 제도로서 사건의 사실문제를 법관이 아닌 배심원이 독립적으로 인정하고 법관은 이를 채용하여 법률적 결론을 내리는 제도이고, 참심제는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채택하고 있는 제도로서 사실문제 뿐만 아니라 법률문제도 일반 시민(및 해당분야의 전문가)인 참심원과 법관이 합의하여 다수결로 재판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나라의 재판은 법률전문가인 직업법관만이 수행하도록 되어 있어서 법률적용의 문제는 물론이고 과거 발생한 사실을 사실로서 확인하는 절차에서도 일반시민이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재판의 방법 및 그 주체가 국가에 따라 이토록 큰 차이가 나는 것은 각 국가의 역사와 문화가 다른 탓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이제 서구의 국가에서 오랫동안 채택해 온 재판방식을 모델로 삼아 시민의 사법참여를 보장하는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꿈조차 꾸지 못하던 일이었습니다.

시민의 사법참여는 국민주권의 실현

우리나라에서 시민의 사법참여라는 명제는 우리 헌법이 선언하고 있는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나옵니다. 국가의 권력집중을 막기 위해 입법권, 사법권 그리고 행정권이 분리되어 있지만 이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비롯되어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습니다. 입법권은 국민의 대표자로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된 국회의원이 그 권한을 행사하고 있고, 행정권도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이 국정의 최고운영자로서 행사하고 있어서 국민주권의 원리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권을 행사하는 사법권에는 국민주권의 원리를 구현할 수 있는 내용물이 전혀 침전되어 있지 않은 대표적인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입법영역과 행정영역에서처럼 사법의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조인의 자격이 있는 자를 대상으로 일반시민이 선거를 통해 일정한 지위의 법원 및 검찰인사를 선출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 방안보다는 시민의 직접적인 재판참여를 통해 사법권의 민주화를 일구어 내려는 방안을 사법개혁의 큰 그림 속에 넣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도 이른바 '재판원제도'를 도입안을 확정하여 2006년부터는 이를 시행한다고 합니다. 일본의 재판원제도는 일반시민인 재판원이 재판과정 전체에 직업법관과 함께 참여하는 제도로서 배심원이 유·무죄 여부까지만 판단하고, 판사는 형량을 정하는 일을 수행하는 배심원제도와 다르고, 또 시민들이 일회적으로 하나의 재판에만 참여한다는 점에서 일정 전문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여러 재판에서 판사의 재판업무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독일·프랑스 등의 참심제와도 다른 독특한 모델을 도입할 것이라고 합니다.

시민이 재판하는 법정풍경

배심원제도이건 참심원제도이건 혹은 일본과 같은 재판원제도이건 간에 시민이 재판에 참여할 수 있게 되면 현실의 법정풍경은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일반 시민들이 배심원 혹은 명예법관 또는 재판원 자격으로 재판에 참가해 증인과 피고인에게 진술을 요구하고 판사와 함께 사실을 심리하며 유·무죄 판단과 형량 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방향으로 재판 운영이 바뀌게 되면 재판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법관이 법률 비전문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쟁점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법원과 국민들의 거리감도 줄어들 수 있게 됩니다. 시민이 재판참여를 경험하게 되면 국민이 인권과 법률이 갖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이 공공을 지탱하는 주권자라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특히 시민이 형사재판에 참여하게 되면 형사법관 개인의 직업관에 기초한 형식적이고 경직적인 가치관에 일반시민의 다양한 가치관이 추가됨으로써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국민의 법감정과 배치되지 않는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여지가 커지게 됩니다. 특히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형식적이고 고정된 법률적 시각만으로는 합당한 결론이 도출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사회의 건전한 상식 및 통념 그리고 그 시대의 도덕감정과 밀접한 연관속에서만 보다 합당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습니다. 직업법관과 시민재판관의 공동작업은 각자가 사건과정 에 대한 독자적인 가치관과 입장의 제시를 통해 직업법관의 편향성과 사실의 확정에 대한 열린 시각을 담보해 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시민의 사법참여는 거스릴 수 없는 시대의 대세

우리나라는 직업법관이 독점하는 재판의 관료성과 경직성 때문에 사법불신이 만연하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개방화·민주화 추세에 따라 이성적인 문명국가의 재판제도의 한 요소로 시민에 의한 재판참여를 실현하려는 요구는 이제 거스릴 수 없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얼마전에 KBS `한국사회를 말한다' 제작진이 KBS 방송문화연구소에 의뢰해 전국 7대 광역시 소재 20∼60대 남녀 1천38명을 대상으로 사법개혁 관련 전화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3.04%P)를 벌인 결과 `배심원제와 같이 시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80.6%가 `찬성한다'고 응답한 반면 `반대한다'는 답변은 16.6%에 불과했습니다. 찬성 응답자(837명)에게 `직접 재판과정과 판결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가'를 묻자 85.9%가 `그렇다', 12.8%가 `그렇지 않다'고 각각 대답해 배심원제 도입과 도입 후 참여의사 모두 긍정적인 견해가 월등히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 응답자를 대상으로 `만일 배심원제 등을 통해 시민이 직접 재판에 참여할 경우 재판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를 물은 질문에는 51.2%가 `법적용에서 국민의 정서와 의식이 제대로 반영될 것이다'를, 23.0%가 `보다 공정하고 신중한 재판이 이뤄질 것이다'를 각각 꼽아 긍정적인 전망이 74.2%를 나타냈습니다. 반면 `공정성과 객관성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와 `법의 권위와 위엄이 떨어질 것이다'는 우려의 답변은 각각 18.8%와 4.9%에 그쳤습니다.

열린 사법시대를 위한 준비

물론 법원, 검찰 등 당사자들은 법에 무지한 일반인들이 재판에 참가하는 데 대한 불안감을 적잖게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민의 재판참여가 성공하려면 재판의 기본원칙에 대해 시민들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적정한 판단을 할 수 있는 기본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등교육이나 중등교육 나아가 고등교육기관에서 이른바‘미래의 사법주권자’에 대한 사법교육을 충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법의 국민 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열린 사법 시대가 도래하는 날을 기다립니다.

글| 법학과 김성돈 교수
편집| 스큐진 이명우 기자(imssi200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