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크루서블'을 보고

  • 58호
  • 기사입력 200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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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법학과 김성돈 교수

관객제로의 영화

1996년 기다려왔던 영화가 대구에서 개봉되는 날이었다. 때마침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혹은 진출을 눈앞에 둔)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있었던 날인지라 주변이 온통 들뜬 상태였다. 중계방송을 보러 서둘러 귀가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지만, 어수선한 분위기를 뒤로한 채 나는 영화관을 향했다. 하지만 영화관에 도착은 나는 실로 기이한 일을 당하였다. 아직 한사람도 티켓을 구입하지 않아서 영화가 상영될지 미지수라는 직원의 해명을 들었던 것이었다. 예정된 상영시간이 지나서야 반신반의했던 바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영화는 끝내 상영되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말로 공손하게 응대하는 직원에게 시비를 걸 여지도 없었다. 오기 반 호기심 반으로 그 다음날 학교 강의를 다 마친 후 미리 확인해둔 상영예정시간에 맞추어 다시 영화관을 찾았다. 그 날 역시 나 이외에는 다른 관객이 없어 또 다시 상영불가판정이 내려졌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충격만점의 영화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서울에서 형사정책과목을 수강하는 법과대학 학생들에게 어떤 희곡작품 하나를 일러주고 그와 과제물을 부과하였다. 제출된 과제물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단어들은 ‘답답한 가슴', ‘분노', ‘경악', ‘충격' 등과 같은 용어들이었다. 수강생의 대부분이 고학년이었음에도 ‘대학에 들어와 법학교과서 이외에 최초로 읽은 책'운운하는 소리에 나 역시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개봉당시 ‘북풍공작'으로 어수선했던 한국사회의 분위기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했고, 특히 심각한 문화적 척박성을 뽐내었던 대구에서는 구경조차 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그 영화는 아서 밀러(Arther Miller)의 희곡 ‘시련(The Crucible)'을 스크린에 담았던 ‘크루서블'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1999년 우리나라 유시어터에서 세계최초로 공연된 창작뮤지컬의 원작이기도 한 ‘시련'은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는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아서 밀러가 직접 제작에 참여하여 ‘크루서블'이라는 영화로 탄생시켰다. 세계적인 여배우 마르린 먼로와 두 번째 결혼 후 다시 이혼하기도 한 밀러는 1950년대에 전 미국을 공포의 도가니(crucible)로 몰아넣었던 매카시 선풍에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연루된 것을 보고 매카시즘을 풍자하기 위해 1955년 ‘시련(The Crucible)'이라는 희곡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시련'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거주하였던 지역 가운데 가장 지성이 높은 곳으로 간주되었던 메사추세츠 주의 세일럼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1692년 실제 있었던 충격적인 마녀재판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중세시대를 방불케 하는 마녀재판이 신세계를 개척하고 높은 지성과 학식을 겸비한 지성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마녀재판의 스테레오타입이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마녀재판과 진실찾기

세일럼의 마녀재판은 미국문명사의 치욕으로 손꼽히고 있다. 마녀로 지목된 자들의 말은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었고, 항변은 모두 법정모독죄로 처리되었으며, 피해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의 증언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그리고 마녀의 피해자로 자처하는 중의 한사람의 복수극에 의해 조종된 마녀사냥의 결과 19명의 남녀가 교수형에 처해졌고, 140명이 투옥되었다. ‘주홍글씨'를 쓴 나다니엘 호손이 법률가의 길을 가게 하지 않고 소설가가 되게 만든 것은 그의 직계선조가 세일럼의 마녀재판을 행한 윌리엄 호손 판사였다는 후문도 있다.

재판은 법적용에 앞서 그 법이 적용될 과거‘사실'을 확정하는 마당이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상 과거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캐내기란 원래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물적인 증거가 있어도 그것과 사실과의 연관성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 물적인 증거가 없으면 증인의 기억에 의존할 도리밖에 없다. 아직도 최고의 판결로 꼽는 솔로몬의 재판도 실상을 뜯어보면 진실한 사실발견을 위해 사용한 수단이 ‘형식논리'와 ‘경험칙'밖에 없다. 증인도 없고, 물증도 없는 상황에서 칼로 아이를 베어 반쪽씩 나누어 가지라는 말에 자신이 아이의 생모라고 주장하는 두 여자가 각기 다른 반응을 했다는 것 자체가 명판관 솔로몬에게는 행운이었다. 둘다 반대하거나 둘다 찬성하는 태도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가지 경우의 수가 배제된 상황에서 나머지 두가지 반응 중에 진실한 반응 한가지를 찾는데 사용한 수단은 경험칙이었다. 만약 생모라면 아이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 자르지 말라는 반응으로 나오기 마련이라는 인간본성에 기초한 경험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오늘날에도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는 기제는 그리 많지 않다. 혈액형검사, 유전자검사가 솔로몬의 명판결의 빛을 바래게 할 수는 있지만, 과학조차도 진실의 앞마당에는 접근조차 못할 경우가 허다하다. ‘거짓말탐지기'가 등장하여 진실 캐기를 시도하였지만, 거짓과 진실에 대해 대응하는 심장의 박동 및 감정의 기복을 척도로 사용하는 그 기계의 단순함에는 후안무치의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거짓을 기정사실화 해 버릴 위험성도 내장되어 있다. 최근 미국에는 그러나 감정과 정서적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심장의 변화가 아닌 뇌파의 움직임을 통해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뇌 지문'측정방식도 도입되고 있다. 영화 ‘페이첵'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과거사실이 뇌를 통해 화면에 영상 처리되는 이른바 ‘뇌 영상'시스템이 현실화될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마녀재판이 인류 앞에서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영화 관람불가자

‘진실한 사실'이 무엇이고, 그 진실한 사실이 현실의 법정에서는 어느 정도로 밝혀질 수 있는지 그리고 가공된 사실이 어떤 형식으로 ‘짜 맞추어져' ‘진실한 사실'로 확정되는지, 또 그 사실과 진실한 사실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자는 이 영화를 볼 자격이 없다.

이 영화를 보고 기독교나 기타 종교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계관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는 종교인이 있으면 그는 그냥 종교인이지 신실한 신자조차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집단광기를 보고 그러한 집단광기의 힘에 의해 진실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보면서도 우리 시대의 집단광기와 우리시대의 마녀재판의 주도세력을 색출해낼 수 없으면 그에게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재판을 주도하는 소수의 지도자들이 내리는 판단 및 그들이 이끄는 방향을 의심없이 지지하며 갈채하는 자는 역사주의의 오류와 위험성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나 다름없다. 이 영화가 만드는 최고의 비극적 요소, 즉 인간사의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척도를 보이지 않는 신의 뜻으로 돌리는 일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리는 자는 모든 종교의 근본주의적 시각이 요구하는 신화성과 맹목성에 무릎을 꿇는 비굴한 자임에 틀림없다. 이 영화를 보는 도중에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정직과 위선 등의 대립적 가치에 대해 사색에 빠지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와는 도덕철학에 관해 대화를 나눌 여지가 더 이상 없다. 이 영화의 대화내용에서 목숨을 버려 신념을 지키는 고귀한 영혼, 진정한 용서의 의미, 명예와 불명예에 대해 크나큰 울림을 듣지 못하는 자는 가슴이 없는 자임에 틀림없다.

의심을 찬양하라

특정 이데올로기를 위해 생명을 내놓는 자나, 특정 신념을 위해 삶을 포기하는 자나 모두가 신의 뜻에 따라 목숨을 바치는 자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매트릭스에 갇힌 자 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극우세력을 키우고 있는 기독교근본주의나 짓밟힌 알라신을 위해 기꺼이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이슬람근본주의가 만들어내고 있는 테러전 역시 시스템설계자의 프로그램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그 무엇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은 ‘의심을 찬양하는 일'밖에 없는 것일까.



편집ㅣ스큐진 김지연 학생기자(fire_fox48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