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형수 이야기! - 데이비드 게일

  • 60호
  • 기사입력 200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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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수의 죽음에 우리가 차갑게 등을 돌릴 때, 우리 사회는 결국 자신의 무덤을 파는 무서운 재앙에 직면할 것이다” - 영화의 대사 중에서


사형수가 된 사형폐지론자, 데이비드 게일

사형수 '데이비드 게일'은 27 세에 철학교수가 되었으며 한때 지성계의 영웅으로까지 평가받았다. 사형 형 집행을 나흘 앞두고 있는 그의 죄명은 강간살인, 피해자는 같은 과 교수이자 오랜 친구인 여교수 '콘스탄스'였고, 두 사람은 함께 사형제도 폐지 운동단체인 '데스 워치( Death Watch )의 일원으로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사형폐지운동에 관여하여 왔다. 죽음을 앞둔 데이비드 게일은 어떻게 죽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의 기록을 남기기 위해 잡지사의 미모의 여기자 비치 블룸과 인터뷰를 요청한다. 데이비드 게일의 삶( The life of David Gale )이 원제인 영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미시시피 버닝'에서 보여주었듯이 평소 사회성 짙은 영화를 제작해온 알란파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데이비드 게일은 그러나 강간살인사건의 진범을 캐내는 스릴러 영화도 아니고, 한 사람의 인생유전을 그려내고 있는 자서전적 영화도 아니다. 반전영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식스센스 보다 더 충격적인 반전 장치를 마련해 두고 있는 영화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제도 존폐론을 그 본령으로 하고 있는 영화이다. 동일주제에 관한 백편의 논문을 무색케 만들 정도의 위력을 가진 이 영화만큼 큰 울림을 가진 영화가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사형제도 폐지를 웅변하는 많은 영화 가운데 이 영화 보다 더 큰소리로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영화가 있었을까?

사형제도는 왜 폐지되어야하는가

사형제도는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결함투성이의 제도이다. 사형이 존치되고 있는 나라에서도 중범죄가 감소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대로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중범죄가 급증하고 있는 증거도 없다. 따라서 사형제도가 가진 일반예방효과는 실증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사형집행을 통해서 범죄인은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므로 범죄인을 교화, 개선한다는 차원의 특별 예방적 효과를 사형제도는 원천적으로 가질 수가 없다. 살인자의 생명을 빼앗는다고 해서 피해자의 생명의 상실이 상쇄되는 것도 아닌 만큼 응보이론도 현실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 년 4 월 현재 사형 제도를 존속시키고 있는 국가는 84 개국(폐지국은 111 개국)이나 되며, 우리나라도 존치국의 대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의 사법부나 헌법재판소는 사형제도가 필요악이긴 하지만 사형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강변하고 있다. 어떤 사회에 악의 존재가 필요불가결하다고 한다면, 그 악의 존재가 불필요한 시기가 도래하였다는 징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사형제도는 법정에서 확인된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 사후적으로 드러나더라도 아무 것도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제도이다. 법정에서 확인된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는 어렵지만, 그 사실의 왜곡 상을 뒤바꿀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진실을 아는 자가 설득되거나 뉘우치고 진실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 당사자가 반대증거를 수집하는 등 갖가지 입증활동을 통해서 적어도 합리적 의심을 일으킴으로써 확인된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최종판단자에게 확신시킬 수도 있다. 탄핵주의 소송구조 하에서 심판자(판사)와 소추자(검사)를 다른 주체로 만들어 놓고 있고, 증인이나 증거서류 혹은 증거물을 제시하는 방법 등으로 사실 확인의 절차를 밟도록 해두고 있는 것도 바로 확인된 사실이 시시각각으로 뒤바뀔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탓이다. 피고인의 자백하나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회유나 강압적인 절차 등 그 자체 불법한 방법으로 수집한 증거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는'독수독과(毒樹毒果)이론 역시 사실오인 내지 허위사실의 인정을 막기 위한 이론적 장치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소송절차를 3 심제로 운용하고 있는 것이나, 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내려진 후에라도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는 등의 경우에는 재심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나 모두 진실 밝히기의 어려움과 밝혀진 진실이 실제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전제하고서 진실만을 확인하고 진실에 가까운 사실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바람을 담은 제도적 장치이다. 그러나 확인된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고 밝혀지더라도 아무것도 원점으로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법제도, 그 법제도가 바로 사형제도인 것이다. 이러한 결함을 안고 있는 사형제도의 폐지를 무한 유보하는 것은 인류의 지성이 도달한 현재수준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할 수 있다.

사형제도의 존치는 우리 헌법의 근본정신에도 배치된다. 생명권은 헌법 제 37 조 제 2 항의 기본권제한에 관한 일반적 유보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사형제도는 생명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생명권의 제한이므로 헌법 제 37 조 제 2 항 단서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형제도가 정치적 억압이나 다른 종교 세력을 배척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였던 과거사의 일들을 조금만 들춰내어 보면, 사형 당한 희생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억압주체들이 사형되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구태여 중세시대의 마녀재판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조봉암 사건이나 인혁당 사건 등은 국제적으로도 대표적인 사법살인의 예로 손꼽을 수 있다. 그러한 일들은 지금도 지구촌 도처에서 자행되고 있기에 '피가 더 큰 피'를 다시 부르는 사형 제도를 인류사회에서 영구 추방시키는 일이 하루라도 빨리 실현되어야 이 세상이 보다 나은 세상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 감상법

오판의 경우 회복불가능이라는 결함을 가진 사형제도의 생명을 끊기 위해 영화 데이비드 게일에서 알란 파커 감독은 카알 포퍼의 반증 이론적 관점까지 동원하고 있는 듯하다.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일반명제는 단 한 마리의 검은 백조가 나타남으로써 반증된다. 사형제도의 정당성 및 존속력도 사형 제도를 통해 무고한 자의 생명이 박탈될 수 있다는 반증사례가 나타나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된다. 영화 데이비드 게일은 사형 제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완벽한 반증례를 제시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표현할 길이 없는 섬뜩한 전율을 선사하며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따라서 반전과 반증을 위해 장면 장면마다 설정해 둔 복선을 음미하는 것은 이 영화를 보는 재미를 한층 더할 수 있다. 영화전반부에 낡은 트럭과 함께 등장하는 카우보이, 그리고 렌트한 자동차의 고장조짐, 진흙탕 수영장, 영화 전반부에 흐르는 오페라 투란도트의 음악과 할복하는 여인이 어떤 다른 장명과 조응하게 되는지를 눈여겨보자. 무엇보다도 데이비드 게일이 겪게 될 시련의 서막을 제공해주는 최초의 사건이 철두철미 조작된 사건이었지만, 데이비드 게일이 사형제도의 반증 예를 제시하기 위해 만든 완벽한 시나리오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에스컬레이터 된 또 다른 조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반증이론의 이론적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만약에 그 반증예가 조작에 터 잡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용납될 수 있는 수단인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점에서 이 영화가 주는 또 하나의 보편성 있는 주제인 '목적/수단관계'가 우리를 끝없는 사색의 길로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영화 한편이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해 보고 싶은 이가 있으면 이 영화야 말로 최상의 시금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은 액션이다

재미와 감동과 교훈이 각각 33 . 3 %로 배합되어 있는 이 영화는 100 %의 만족도에 단 1 % 부족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나머지 1 %의 요소를 채워야 할 자는 다름이 아닌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임을 알 수 있다. 데이비드 게일의 '삶',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데이비드 게일의 '죽음'을 통해 이 영화의 감독은 '가치 있는 삶인지를 평가하는 척도란 욕망의 실현이 아니라 합리성, 동정심, 자기희생'이라는 라캉의 욕망이론을 우리에게 강의하고 있다. 영화 속의 데이비드 게일은 '죽음'으로써, 감독은 이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1 %의 부족분을 채워 넣었다. 삶은 구경도 아니고 사색도 아닌 바로 액션 그 자체일진대, 나는 여전히 그 1 %를 채워 넣을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




글ㅣ법학과 김성돈 교수

편집ㅣ스큐진 김지연 학생기자(fire_fox48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