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마리아’와 성매매

  • 71호
  • 기사입력 2004.11.24
  • 취재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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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영화 ‘사마리아’와 성매매

내가 사마리아를 멀리한 이유

성매매특별법의 세찬 광풍이 이 땅의 구석구석을 휘몰아치고 있을 무렵 오래전부터 점찍어 두었던 ‘사마리아’를 보기로 작정했다. 비디오 가게에서 몇차례 집었다가 놓곤 했던 사마리아를 흔쾌히 보지 못한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가지는 그 영화의 선전포스터에서 받은 부정적 이미지 때문이었고 다른 한가지는 그 영화의 감독이 천착하는 주제가 너무나 진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사마리아’는 선정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주제의 무게감은 아직도 나를 짓누르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사마리아’는 팔레스타인 중앙 부근에 있었던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였다. 기원전 이스라엘을 정벌한 아시리아제국의 식민지 정책으로 이주와 혼혈을 피할 수 없었던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으로부터 줄곧 배척과 멸시를 당하였다. 영화 사마리아가 - 비록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원조교제에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 성매매 행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마리아’는 성매매가 이루어진 공간적 장소를 메타포로 삼고 있는 듯하고, 성매매여성을 천한 사마리아 여인에 비유하는 세간의 통념적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법은 오늘날 ‘성매매’로 규정되고 있는 사람의 행위에 대해 다양한 의미부여를 해왔다. 한때는 그것을 타락한 행위(윤락행위)로 규정하더니 최근에는 그것의 윤리적 요소를 빼내고 성매매행위라고 부르고 있다. 매매의 대상은 ‘성’이 아니라 사람의 ‘몸’,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는 사람의 몸을 통한 용역(서비스)제공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성매매행위의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든 성매매에 대한 법의 완고한 태도 자체는 변함이 없었다. 형법은 성매매행위를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범죄행위로 보아왔고, 민법은 성매매계약을 무효에 해당하는 행위로 보아왔다. 그러나 성매매에 대한 이러한 법의 태도와 영화 사마리아의 시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성매매가 사람의 몸과 관련되어 있기에 우선 법과 몸과의 관계부터 생각해 보자.


몸에 대한 법의 태도


근대이후 각국의 법정책은 사람의 ‘몸’을 수단화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사람의 몸은 인격권의 대상이 될 뿐 물권법의 객체가 될 수 없다는 이러한 법정책은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기제가 되었다. 이른바 인격절대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법정책은 개인에게 자신의 몸에 관한 자유로운 처분권을 인정한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처분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듯이, 자신의 몸의 일부를 - 생명단절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 처분하는 계약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자기 몸에 대한 스스로의 가해는 물론이고 동의를 받고 타인의 신체를 상해하는 행위도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법은 몸에 관한 개인의 자유로운 처분권한을 상당부분 제한하고 있다. 사람의 신체의 일부에 대한 처분계약이 사회질서에 위반될 때에는 반사회질서로서 무효(민법 제104조)가 되고, 타인의 동의를 받은 신체상해행위도 그것이 사회상규(형법 제20조)에 반하는 경우에는 범죄가 된다.

더 나아가 사람의 몸으로부터 분리된 몸의 일부를 처분하는 경우는 몸 그 자체를 처분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제한되고 있다. 2000년부터 시행된 장기등이식에관한법률에서는 신장, 간장, 췌장, 심장, 폐, 골수, 각막 등의 매매를 금지하여 왔고, 2005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인체조직안전및관리등에관한법률과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률에서는 뼈, 연골, 근막, 양막, 인대, 건, 심장판막, 혈관, 그리고 정자와 난자의 매매도 금지하고 있다. 종래 매매가 허용되어 왔던 혈액은 1999년부터 매매금지의 목록에 포함되었다.

몸의 상품화와 성매매금지의 이유

개인의 자유로운 몸처분권을 제한하고 더 나아가 몸의 일부가 매매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려는 법정책의 이유는 사람의 몸을 도구화하게 될 위험을 방지하려는데에 있다. 인격절대주의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몸의 상품화를 반대하는 경향은 “사람의 신체와 신체의 일부는 그 자체 경제적 이익을 발생시켜서는 안된다”(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and Biotethics 1996)는 원칙의 선언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몸의 자유로운 처분을 제한하는 기준이 너무나 모호하고 불확정적이라는 점에 있다. 아무리 구체화시켜 보아도, 사회질서와 사회상규라는 개념은 더 이상 구체화 될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사회질서란 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을 의미하고, 사회상규란 선량한 사회인의 윤리감정을 의미한다는 식 이상의 내용으로 구체화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더구나 사람의 몸에 관한 특정토픽에서 사회질서 내지 사회상규에 대한 현대적 의미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는 상품화금지 혹은 반상업주의는 현대인의 거대하고 끝없는 내적 욕망의 세계를 규율하는 행위의 준칙이 되기에는 역부족이다. 뿐만 아니라 나날이 비대해지고 활성화되고 있는 거대한 시장의 질서속에서 반상업주의의 논리는 오히려 시대착오적이라는 비난을 면하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격절대주의를 고수하려는 입장에서 성매매금지를 기치로 내세우고 있다면, 그것은 성매매가 다른 형태의 몸의 상품화와 그 본질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삼고 있는 것 같다. 대가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몸을 통한 서비스제공(성매매)은 파출부를 고용하여 집안일을 시키는 일 혹은 시간당 대가를 지급하고 안마시술을 받는 일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일로 보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성매매는 결국 사람의 영혼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추측’이 깔려있는 듯하다. 성매매특별법은 따라서 성인남녀간의 성매매라도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악한 행위’라는 가치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몸과 영혼 사이에 심오한 이음매가 있다는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성매매는 ‘마음의 법’에 위배되는 금지된 행위가 된다. 이에 따르면 성매매는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 즉 도리를 벗어나는 행위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러한 길이 확실히 있는지는 의문이며, 있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바로 ‘그’ 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사마리아 속의 딸의 아버지는 ‘딸’에게 그 불확실한 길을 가르치려고 애쓰고 있다(영화에서는 ‘딸’에게 운전교습을 하는 일로 상징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을 죽이는 더 큰 범죄를 범하였다).


성매매와 사마리아인

그러나 몸은 몸이고 영혼은 영혼이라고 하는 생각에 의하면 자유로운 의사에 기한 성매매는 ‘마음의 법이 억지로 만들어낸 계율’의 강 너머에 있는 행위이다. 이러한 생각에 의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확실한 가치의 영역 보다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영역, 즉 피와 살이 있는 몸 그 자체가 그 행위판단의 기준이 된다. 사마리아속의 ‘딸’은 친구의 죽음을 통해 그러한 ‘몸의 법’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 결과 몸은 대가관계라는 현실적 조건까지도 초월하여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정화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영화속에서 ‘딸’은 대가관계로 받은 돈을 상대방에게 되돌려 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성매매를 악으로 간주하는 시각은 마치 유일신을 신봉하는 유대인 종교관과 세계관이 사마리아인을 이교도로 취급하고 천한 족속으로 보아 상종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예수는 강도만난 사람에 관한 비유로 답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산속에서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 옆을 지나간 사람 중에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사람은 유대인 제사장도 아니고 율법학자도 아니었다고 한다. 강도만난 피해자를 도와준 자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천하게 생각하던 사마리아인이었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을 혁파한 예수의 세계관에 의하면 사마리아인이 바로 우리의 선한 이웃이다. 유대인과 바리새인의 위선을 질타한 예수는 우물가의 죄많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생수를 건네주었다.

예수의 비유가 사마리아 인에 대한 유대인의 통념적 시각의 교정을 겨냥하였듯이 영화 사마리아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도 성매매자(딸,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법의 시각과 우리의 통념적 시각을 고치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허물많은 인간의 길에서 만나는 사마리아인

법은 언제나 ‘금지와 허용’, ‘불법과 적법’, ‘무효와 유효라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이원적으로 코드화 시키면서 통제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스펙트럼 중에는 그러한 이원적 코드 중 어느 것에도 분류될 수 없는 불확실한 영역도 존재한다.
성매매도 바로 그러한 불확실한 영역에 해당한다. 인권침해적 요소가 없는 자발적인 성매매에 대해 ‘아버지’(후견자)의 시각에서 불법/금지/무효 코드로 분류하는 법의 태도는 좁은 유대교의 시각에서 사마리아인을 바라 보는 시각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 불명확한 영역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을 가진 우리의 고정된 세계관에 의해 그리고 사회상규 혹은 사회질서라는 모호하고 불명확한 기준만을 가지고 범죄시 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그 영역을 제3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것이 ‘허물많은 인간’이 취할 도리(나아가야 할 길)일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쳐라’는 새로운 계명은 성매매를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영역’속으로 넘겨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계명은 개인의 건전한 양심과 성숙한 의식이 살아 움직이는 사회에서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는 그러한 건전한 양심과 성숙된 의식이 ‘진흙탕’속으로 실종되어 간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사람이 가야 할 길위에서 진흙탕을 만날 때도 있다(영화 사마리아의 마지막 장면은 운전을 갓 배운 딸이 운전하는 자동차의 바퀴가 진흙탕에서 겉돌고 있다). 하지만 진흙탕속의 사마리아인도 엄연히 우리의 이웃이다.

편집ㅣ스큐진 김지연 학생기자(fire_fox48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