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 억압과 의무의 건너편

  • 103호
  • 기사입력 2006.03.27
  • 취재 전미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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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들어가는 말

영화를 감상하고 영화와 법의 접점을 찾아내기 위한 단상을 할 때마다 드는 두려운 생각이 있다. 내가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 보고 나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달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드는 것은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가 동성애를 주제로 한 것이라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 영화가 동성애를 어떻게 보고 있는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그리고 법학자의 입장에서 동성애코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달이 아니라 손가락만 헤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글쓰기를 망설이게 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두 남자

고립무원의 산 ‘브로크백’에서 여름 한철 돈벌이를 위해 양떼를 방목하는 일을 하고 있는 두 남자, 애니스(히쓰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홀)이 있다. 그들은 처해 있는 환경의 특수성 때문인지 자신들에게 내재해 있는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느날 갑자기 ‘동성애’라는 금단의 과일을 베어 먹게 된다. 낙원에서 추방된 성경속의 스토리와는 달리 금단의 열매를 먹은 그들에게 절대 고독의 땅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들만의 낙원이 된다. 일을 마치고 산을 내려온 그들은 각자의 생활터전으로 돌아가 각자의 반려자를 만나 평범한 삶을 살다가 4년 후에 다시 재회하게 되고, 그 후 20여년간 자유와 금지사이의 경계선을 비밀스럽게 넘나들면서 그들만의 낙원, 브로크백 마운틴에로의 귀환을 꿈꾸게 된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화려한 볼거리 하나 없이도 두 남자의 감정라인을 따라가게 만드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동성애’라는 주제를 통하여 우리를 또 하나의 거대한 벽 앞에 서게 하는 묘한 끌림이 있는 영화이다.

 

동성애에 대한 평가의 변화

동성애란 자신과 같은 성의 사람에게 정서적으로나 성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끌리는 성 지향성을 말한다. 사회적으로 금기와 억압의 대상이 되어 왔던 동성애가 오늘날 성적 소수자의 인권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새로운 평가를 받고 있다. 동성 간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나라들도 하나둘 씩 생겨나고 있고,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도록 한 텍사주의 \\'소도미\\'(Sodomy)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동성애자 차별금지법의 조속한 제정, 동성애 혐오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률을 제정할 것의 요구 및 동성애자에게 부모가 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기 위한 헌법적 조치 등을 촉구하는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성애자들을 인정하기 위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2001년 4월 제정된 국가인권위법 제31조에서는 “성적지향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기까지 하고 있고, 최근 한국판 브로크백 마운틴에 해당하는 ‘왕의 남자’라는 영화가 흥행에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어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각에 상당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이성애만을 유일한 삶의 양식으로 여기는 일종의 문화적 근본주의가 만연함을 부인할 수 없다. 60년대의 미국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처럼 동성애자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정도는 아니지만 ‘타락한 쾌락에 집착한 나머지 동성애자가 된다’는 비난의 색깔이 여전히 강하게 배어 있다.

무신론자가 극형에 처해졌고, 거지가 범죄자로 취급받았으며 게으름을 이유로 사형이 선고된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법은 무신론자나 거지 혹은 게으름 피우는 자에 대해 더 이상 억압과 금기의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 동성애에 대한 법의 태도가 장차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도 이러한 차원에서 접근해 보면 매우 재미있는 상상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멋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성애 중심의 법제도에 대해 매우 의아해 할지도 모른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가치체계에 반발하는 아들이 끊임없이 나오듯이 사회에서도 기존의 사회질서에 도전하는 의식의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보면 동성애에 관한 현재의 법제도도 상당부분 변모를 겪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가는 길

그러나 어떤 법제도도 그 시대와 그 사회의 가치와 의식을 뛰어넘을 수 없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한 개인이 사회적 편견과 억압의 울타리를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매우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애니스는 자신의 동성애적 성 지향을 현실의 삶속에서 구가하고 싶은 ‘자유’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억압’사이에서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기만 한다. 자유와 행복을 선사해주는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현실적인 법제도로 대표되는 억압의 칼이 드리워져 있는 현실에서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우리의 삶속에서 걷게 되는 만날 수 없는 ‘자유’의 길과 ‘의무’의 길이 보여주고 있는 평행선을 직시하도록 한다. 애니스는 가족에 대한 의무감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지 못한 채 도망치자는 잭의 유혹에 응하지 않고 내면적으로만 자유의 강을 어렵게 헤쳐 가는 태도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존재와 당위, 그리고 동성애

법이 당위규범이라면, 당위(Sollen)는 존재(Sein)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존재는 존재이고 당위는 당위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한때 이러한 양자택일 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러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 세상에는 확실하게 규명된 존재의 세계 보다는 일정한 목적에 의해 규명되지 않았으면서도 존재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온 유사(가짜) 존재의 세계가 더 많다고 생각하고, 법은 존재의 세계를 그대로 반영한 부분도 있고, 존재가 아닌 것이지만 일정한 목적 하에 당위의 질서영역으로 편입시킨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남녀가 동등하다는 점은 존재의 세계이고, 남녀평등법은 그 존재의 세계를 당위규범화한 것인 반면, 일부일처제는 인간본성에 관한 있는 그대로가 아니지만 일정한 기획 하에 당위규범으로 법제도화 한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공리주의적 측면에서 볼 때 문제점이 더 많이 생길 수 있고, 사회질서유지의 차원에서도 혼란이 가중될 수 있다는 정책적 판단의 결과 만들어진 당위가 바로 일부일처제인 것이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보면 법은 동성애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가장 궁금한 것은 동성애적 성지향이 원래 그 개인에게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가 후천적으로 얻어낸 것인지 하는 문제이다. 개인적인 성 지향성의 결정요인과 관련해서는 유전이나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선천적으로 타고난다고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개인이 자라난 환경적 요인에 의해 후천적으로 형성된다고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고, 이 두 요소의 상호작용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어느 태도든지 정설로 굳어진 것은 없지만, 성 지향은 매우 어릴 때 자신도 인식하기 전에 확립되는 것이며 개인의 의지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태도가 점차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동성애가 그 개인의 의지나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법적인 대응에서 동성애자들을 비난하거나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 법제도가 인간의 본성 및 인간의 행동의 본질과 불일치되게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의 법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들에게 결혼할 권리, 아이를 입양할 권리, 양육할 권리를 인정해주지 않으면서, 한편으론 성소수자들이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아 키우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한다. 또한 법이 결혼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지 않는데도 미혼을 택한 남녀에겐 ‘일탈’낙인을 찍는다. 미혼모와 그 자녀는 대한민국 국민이라기보다는 죄인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있다. 또한 가족 단위로 편성된 복지제도는 정작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다양한 가족들, 소수자들을 외면하고 있다.

동성애는 이성애와 성지향성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므로 법적인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성애자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인권을 보장하고, 현실적인 법적 권리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동성애자간의 혼인을 허용하더라도 가족제도의 붕괴가 초래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브로크백 마운틴

누구나 자신만의 브로크백 마운틴이 있다. 그 산은 자유의 땅이고 행복의 원천인 지상의 낙원이다. 그러나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억압의 강과 의무의 사막이 가로놓여 있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자신만의 브로크백을 마음속에 품은 자들의 내면을 훈육시키는 교과서 같은 영화이다. 우리가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은 억압인가 의무인가? 우리가 정녕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은 억압인가 의무인가?

 

편집 ㅣ 성균웹진 전미린 기자 (wjsalfls@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