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한반도」가 왜 문제인가

  • 111호
  • 기사입력 2006.07.29
  • 취재 전미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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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 영화, ‘한반도’의 어둠과 밝음

실제사건(fact)과 허구(fiction)를 교집시킨 팩션(faction)영화 ‘한반도’에 대해서 말이 많다. 특히 영화평론가들의 영화평은 가히 충격적이라고 할 만큼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다. “관객의 자존심을 생각지 않는 영화”, “부담스러운 과잉의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환상과 극우적 절대선의 불온한 조우”, “한마디로 프로파간다(선전선동) 영화”,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분개하세? 저돌성과 단순성!”, “메시지에 ‘올인’한 영화. 그 메시지가 위험하고 투박한 영화”. 평점점수가 10점 만점에 4점이니 낙제점수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한반도’에는 구경꾼들이 몰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경꾼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명성황후 시해장면과 고종황제의 독살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일제제품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과감하게 불태우기까지 한 관객도 있다고 한다. 흥행대박을 예상하는 이들도 많다.

▣ 영화, ‘한반도’에 있는 것

영화, ‘한반도’속에서 일본은 1907년 대한제국과의 조약 내용을 내세워 남과 북이 이뤄낸 경의선철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주장한다(그러나 현실 역사에서는 1965년 한일협정에서 분명히 1945년 해방 이전에 일본이 가졌던 모든 권리는 포기되었음). 거액의 차관과 핵심기술 이전 사업의 철회를 무기로 일본이 대한민국을 압박해오자, 대한민국의 대통령(안성기)는 사학계의 이단아인 최민재 박사(조재현)의 주장을 받아들여 100년 전의 조약문서에 찍힌 국새 도장이 가짜임을 밝히면 일본의 도발을 격퇴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일본과의 전쟁도 불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이 비현실적이고 무모하다고 믿는 국무총리(문성근)는 국정원 서기관 이상현(차인표)를 시켜 국새찾기 작업을 방해하면서 대일유화정책을 시도한다.

영화, ‘한반도’에서 결국 건드려지는 뇌관은 ‘반일감정’이다. 영화, ‘한반도’는 마비된 관객의 이성의 자리에 맹목적 애국주의를 자리잡게 만든다. 이러한 반일감정과 애국주의를 만들어내는 사상적 틀은 ‘민족주의’라는 그럴듯한 외피를 입고 있다. 100년 전 이 땅,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던 민족주의를 ‘반식민지민족주의’라고 한다면 100년 후 영화, ‘한반도’를 뜨겁게 만드는 민족주의를 ‘보수적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영화 ‘한반도’는 반식민지 민족주의를 날줄로 삼고 보수적 민족주의가 씨줄로 삼아 엮어놓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보수적 민족주의는 민족적 애국주의 감정 속에서 구체화된 사회응집력과 공공질서를 목표로 삼는다. 무엇보다 보수주의자는 민족을 동일한 관점, 습관, 생활양식, 그리고 외관을 가진 사람을 향해 이끌리는 경향이 있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부터 발생하는 하나의 유기적 존재로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애국적 충성심과 민족의식은 일반적으로 함께 나눈 과거에 대한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보수정부들은 대외정책을 국민의 열정을 이끌기 위해 민족주의라는 카드를 사용한다. 영화, ‘한반도’에는 이와 같은 의미의 보수적 민족주의라는 사상적 물줄기가 흐르고 있다.

▣ 영화, ‘한반도’에 없는 것

그러나 보수적 민족주의에 나타나는 치명적 결점은 그들의 과도한 주의와 주장에서 ‘개인’이 없다는 점이다. 사회응집력과 공공질서를 위해 유기체의 하나에 불과한 개인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요구는 무의미하고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영화, ‘한반도’에서 나타난 보수적 민족주의가 표방하는 국가관 및 개인관은 과거 왕조시대 혹은 더 쉽게 말해 영화, ‘실미도’에서 표현되고 있는 국가관과 개인관의 닮은꼴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근대이전의 이른바 ‘구체제’에서는 국가는 그 구성원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었다. 개인은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었고, 국가는 국왕의 생명과 왕조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개인의 목숨을 희생시켜왔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인류사회가 이른바 근대사회에 전환되면서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근대이후 국가는 인간의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러한 자유를 보장하고 강화한다. 근대이후의 국가가 그 구성원인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활용한 것이 바로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해 국가의 기능변화는 법의 기능변화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법은 과거처럼 억압적 기능을 수행하기 보다는 이해관계를 조정하여 원활하게 안전한 사회관계가 형성되도록 돕기 위한 수익적 성격으로 바뀌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법의 수가 증가하였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과거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이후 법이 보여주는 이와 같은 기능변화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법을 만드는 주체가 누구이며 그것을 어떤 절차에 의해 어떤 한계 속에서 만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인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입헌주의라는 정치사상의 발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입헌주의는 인간이 자유롭게 독립된 존재로 서로 간에 원칙적으로 평등한 관계에 있다는 사상이 전 사회에 공감대를 얻게 되면서 지배적 가치가 되었다.

영화, ‘한반도’에는 이와 같이 입헌주의사상이 전제하고 있는 바, 양보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인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지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을 보고 엉겁결에 가슴에 손을 얻는 모습은 국가권력에 비해 개인의 하잘 것 없음을 부각시키고, ‘국가’를 위해 승산 없는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를 애국주의로만 연결시키는 설정 자체는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희생시키는 국가주의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록 방어목적이긴 하지만 헌법상의 절차인 국회동의 없이도 선전포고를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하는 행위는 국민적 합의 없이 이루어진 감정적 애국주의의 발로에 지나지 않음을 영화, ‘한반도’는 간과하고 있다.

▣ ‘한반도’에 없어야 할 것과 있어야 할 것

자유민주주주의를 헌법원리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에는 민족과 국가를 넘어서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선 개인주의를 승인하는 자유주의는 모든 인간이 - 인종, 신념, 사회적 배경, 그리고 그 국가의 국민임 등과 무관하게 - 동등한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보편주의를 인정하고 이는 오늘날 세계 공통적인 인권 개념 속에 반영되고 있다. 다음으로, 자유주의자들은 무제한의 자유가 개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가혹하게 다루고 노예화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 같이, 민족주권이 팽창주의와 정복을 위한 외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도 자유가 항상 법에 종속되어야 하고, 이는 개인과 민족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함을 명심하기 때문에 국제연맹, 유엔, 유럽연합과 같은 초국가적 단계에 의해 감시를 받는 국제법제도를 확립하고자 하는 운동에서 선두에 섰다.

따라서 영화, ‘한반도’가 ‘위대한 미국’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헐리우드식 영화와 차별성을 보이려면, 영화 속의 인물들이 시종일관 도덕주의자가 되어 우리를 설교하지 말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보수적 민족주의라는 최면제를 사용하기 보다는 최소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의 정신을 균형 있게 보여주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영화, ‘한반도’에서는 국가와 개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안보와 질서유지를 앞세우는 국가주의적 모습 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존엄에도 무게중심을 두었어야 한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바람이 있다면, 한반도에서 나오는 영화 가운데 국가가 한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천하의 무게보다도 더 무겁게 다루는 그런 영화가 흥행대작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개인의 자유와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그런 국가가 되었으면 한다.

편집 ㅣ 성균웹진 전미린 기자 (wjsalfls@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