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던지는 영화,「데스노트」

  • 123호
  • 기사입력 2007.01.28
  • 취재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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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던지는 영화, ‘데스노트’ 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내가 본 일본영화들

내가 본 일본영화는 몇편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들 중 대부분은 나로하여금 철학의 근본문제를 사색케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몇해 전에 본 영화 ‘고(GO)’는 관람하는 동안에 내린 하얀 눈을 바라보면서 유명론과 실재론의 대립을 되새겨 보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영화, ‘원더풀 라이프’를 보는 동안에는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나름대로 정의내리기를 시도했었다. 최근에 본 영화, ‘데스노트 - 라스트 네임’은 선과 악에 관한 윤리학의 기초를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칸트의 윤리학은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악이라고 가르친다. 칸트에 따르면 아무리 선한 목적을 위해 필요한 돈이라고 그 돈을 빌리기 위해 친구에게 거짓약속을 한다면 그 친구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도덕준칙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말로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 시절 배운 우화를 통해 사냥꾼에게 쫓기고 있는 사슴을 구하기 위한 나무꾼의 거짓말에 대해 칸트의 엄숙주의적 도덕률이 그대로 유지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더구나 살인조차도 정당방위의 요건을 갖춘 때에는 정당화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형법의 태도는 목적의 정당성이 수단의 용납범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라면 그 속에 어느 정도의 악을 포함하고 있어도 그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영화, ‘데스노트’는 천재 법대생 라이토가 악의 요소가 들어있는 수단을 손에 넣는 데서 시작된다.

주인공 : 라이토와 L

영화, ‘데스노트’가 던지는 질문들

유능한 경찰관의 아들로서 법관을 꿈꾸면서도 법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라이토는 어느날 우연히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자는 죽는다’라는 문장과 함께 상세한 사용법이 적혀 있는 노트를 줍게 된다. 텔레비전에 얼굴이 나오는 흉악범의 이름을 적어보면서 ‘데스노트’의 위력을 실험하게 된 라이토는 범죄자를 제거함으로서 범죄없는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세계각지의 범죄자를 하나하나 죽게 만든다. 범죄자를 처단하며 정의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키라’(킬러의 일본식 발음)와 ‘키라’를 찾아내기 위해 이름도 얼굴도 알려져 있지 않은 희대의 명탐정 ‘L'이 펼치는 두뇌게임을 따라가노라면 수사극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쫓는 자와 좇기는 자가 만들어 내는 거듭되는 반전에 우왕좌왕하는 가운데에서 묵직한 질문을 토해내게 만든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하게 할 수 있는가?

영화, ‘데스노트’가 시종일관 던지는 하나의 물음은 목적 속에 들어있는 ‘선’의 요소가 수단에 들어있는 ‘악’의 요소를 중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그러나 영화가 제공하는 몇가지 복선에 의해서나 우리의 지식 또는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정당한 목적을 향한 수단이 정당화되려면 그 수단이 법치주의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그 답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이러한 원칙적인 답에 대해 설득력을 인정할 수 없게 하는 많은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법적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정당한 목적에 도달할 수 없는 극한상황, 법이나 법제도 또는 그것의 운용주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및 그에 대한 불신, 더 나아가 법과 제도의 압력을 조롱하는 듯이 지속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개인과 사회의 범죄적 타성 내지 본성들이 바로 그러한 요소들이다. 최근 정당한 목적을 위해 불법적 수단도 불사한 이른바 ‘석궁테러사건’에 대해 동조하고 있는 자들의 법감정 내지 정의감정을 영화, ‘데스노트’의 ‘키라’ 및 키라 동조자들의 그것과 같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비유일까.

법제도를 통해 불완전한 현실을 바꿀 수 있는가?

사신 '류크'

영화, ‘데스노트’속의 ‘키라’의 사적처벌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바라보면 ‘키라’는 살인자로서 망상에 사로잡힌 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범죄자라고 하더라도 국가의 공적 형벌권에 의해서만 처벌될 수 있을 뿐이며, 정당한 살인도 법이 허용하는 요건을 갖추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라’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려고 하는 ‘L'도 범죄적 온상이 되고 있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미래지향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

그와 같은 대안은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법망을 아무리 촘촘하게 마련하더라도,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형벌의 수위를 아무리 높여도 범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범죄자들은 통상 형법과 형벌을 사전에 고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전에 고려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언제나 완전범죄를 꿈꾸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사전예방용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범죄에 대한 사후처리용으로 기능할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형)법의 모습이자 한계이다. 그러한 한계를 가진 (형)법을 엄포와 억압의 수단으로 삼을 경우란 그 스스로 정당화될 수 없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들이 법을 은폐용 내지 호신용으로서 도구화할 필요가 있을 경우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직판사에 대한 ‘석궁테러’ 이후 열려진 전국의 법원장회의는 법조인등에게 보복범죄를 더 엄하게 처벌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가칭 ‘사법질서보호법’이라는 이름의 형벌가중 정책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데스노트 대신 석궁을 범행도구로 사용한 우리시대의 작은 ‘키라’가 만들어낸 ‘일회적’ 사건에 대해 ‘사법부에 대한 도전’이니 ‘법치주의에 대한 위협’이니 하면서 과대평가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사회의 각 영역에서 저마다 강도 높은 보호수단을 요구해 올 경우(교사보호법, 소방관보호법, 경찰관보호법 등등의 이름으로!) 특혜시비를 잠재우고 평등처우라는 대원칙을 사법부가 유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더 나아가 법이 가진 한계내지 속성을 생각할 때 그러한 법만능주의 또는 중형주의적 정책이 사법부가 목적으로 하는 범죄예방을 위해 제대로 작동할지는 더 더욱 의문이다.

라이토와 L과 미사의 만남

범죄없는 이상사회는 불가능한가?

사회학자 뒤르껭의 범죄정상설에 의하면 사회가 존재하는 한 범죄는 존재한다.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는 모든 행위가 -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 발본색원되더라도 서로 옷깃을 스치는 행위까지를 불쾌감을 조장하는 범죄로 규정하게 될 것이므로 심지어 천국에서도 범죄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어느 시대든 어느 사회든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범죄없는 사회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형제도가 있다고 해서 흉악한 살인범이 없어지지도 않았고, 아파트투기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해도 아파트 투기행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이쯤되면 범죄가 부정이라면 부정에 대한 대응수단으로서 또 다른 부정(형벌)을 가하는 것은 최초의 부정(범죄)을 제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 부정의 양만 증가시킬 뿐이라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다.

문명국가의 형벌정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때문에 문명국가의 형벌정책은 끊임없이 자유주의를 근간으로 삼아 금지영역을 제한하는 동시에 인도주의적 사고에 의해 형벌의 완화경향을 확대시켜왔다. 형벌의 역사는 폐지의 역사라고 할 만큼, 비인도적이고 잔혹한 형벌도구가 역사박물관속에서 교훈적 자료로만 활용되고 있다. 징역형의 형기도 짧아지고 집행유예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그것도 모자라 벌금형이 오히려 주된 형벌의 기능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사회를 문명국가의 반열에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사형제도도 하루빨리 폐지하지 않으면 안된다. 목적 속의 ‘선’과 수단속의 ‘악’은 별개 독립의 것으로 독자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원리는 범죄진압이나 예방이라는 ‘정당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형벌에 대해서도 똑같이 타당해야 한다. 국가가 판결문이라는 종이위에 사형수의 사인(死因)을 ‘목이 졸려 호흡이 종지됨’(교수형)이라고 적고 있는 현상을 빗대어 국가가 공인된 ‘킬러’로서 현대적 의미의 데스노트를 사용하여 사람을 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데스노트’와 ‘라이프노트’

미국 대통령 부시는 911테러행위를 처단하기 위해 테러의 희생자의 수보다 더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다. 집단살해를 범한 후세인을 처형한 사형제도는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낳아 많은 무고한 자들을 살해대상자의 명부에 올라가도록 했다. 목적속에 들어 있는 선과 수단속에 들어 있는 악의 균형점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시도는 합법으로 포장된 불법적 수단을 양산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먹물이 든 컵을 정화시킬 방법이 없다고 컵의 물을 거꾸로 쏟아부을 수 없듯이 방법이 없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먹물이 든 유리컵을 완전히 투명하게 만들지는 못하지만 그 속에 맑은 물을 계속해서 부으면 최소한 검은 물의 색깔을 회색이나 희뿌연색으로 바꿀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데스노트(살인노트)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라이프노트(생명노트)를 선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라이프노트를 선택할 것이다. 혹시나 영화, ‘데스노트’를 아직 보지 않은 당신이라면 또 하나의 선택과정을 거치라고 제안하고 싶다. 두 편의 영화, ‘데스노트’와 ‘데스노트- 라스트네임’을 먼저 볼 것인가 열두 권으로 이루어진 영화의 원작인 만화, ‘데스노트’를 먼저 볼 것인가를......

영화속 장면들
편집 ㅣ 성균웹진 김동선 (dsironz@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