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시효,「그놈 목소리」

  • 125호
  • 기사입력 2007.02.28
  • 취재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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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시효 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사건25시’와 ‘그놈 목소리’

 한때 인기있었던 TV프로그램 중에 ‘사건 25시’라는 프로가 있었다. 이 프로는 실제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재현한 후 방송 진행자가 긴박한 목소리로 범인의 인상착의나 특징점들을 시청자들에게 알려 범인을 공개적으로 수배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사건25시’는 공익방송프로서 실제로 미궁에 빠진 많은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최근 극장가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그놈 목소리’는 TV프로 ‘사건 25시’와 닮은 꼴이다. ‘그놈 목소리’는 1991년 발생한 실제 유괴사건을 재구성하여 영화화 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유괴한 아이의 몸값을 요구하는 유괴범의 협박전화에 따라 갈팡질팡하는 수사관들과 애간장을 태우는 부모에 카메라가 클로즈업 되고 있을 뿐 정작 범인은 목소리만 나온다. ‘영화’에서 앵커맨의 직업을 가진 피유괴소년의 아버지는 뉴스를 진행하면서 ‘실제’ 유괴사건에서 실제 범인의 녹취된 목소리를 ‘영화’의 관람자들에게 들려준다. 픽션과 논픽션을 오가고 있는 이 영화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영화, ‘그놈 목소리’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

 하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그놈 목소리’와 ‘사건 25시’간에는 몇가지 다른 점이 눈에 띤다. ‘사건 25시’에서는 실제사건을 그대로 재현하였지만 ‘그놈 목소리’에서는 실제사건을 토대로 하면서도 그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몇가지 허구적 요소를 가미하여 재구성하고 있다. 무엇 보다 ‘사건 25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TV매체에서 방영되었고, ‘그놈 목소리’는 제한된 관람객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사건 25시’의 제작의도가 범인검거라는 공익적 목표에 있다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겠지만, 영화, ‘그놈 목소리’의 진정한 제작의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영화적 흥행의 성공’이라는 상업적 목표가 반드시 ‘범인검거’라는 공공의 이익과 병존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놈 목소리’가 진정으로 ‘그놈’을 잡기 위한 공적 의도에 의해 제작된 영화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할 증거가 몇가지 발견된다.

그놈 목소리의 무용성

 우선 ‘그놈 목소리’의 개봉시점이 문제이다. 이 영화의 감독이 ‘이형호 유괴사건’이 실제로 발생하였을 무렵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다큐멘터리제작에 관여하면서 ‘울분과 분노와 섬찟함’을 느끼고 반드시 영화화하겠다는 결의를 품었다고 한다면 적어도 사후약방문이 되도록 하지 않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영화는 아쉽게도 공소시효가 완성된 후에야 개봉되었다.

 다음으로 ‘그놈 목소리’가 들려주고 있는 범인의 실제 ‘목소리’가 범인식별에 얼마만큼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범인의 실제 목소리를 영화속에 삽입함으로써 이 영화를 ‘공개수배극’의 형식으로 만들고 있는 감독의 공적인 의도가 작위적으로 드러났다고 하지만 16년 전 그놈의 ‘목소리’는 범인검거에 별로 소용이 될 것 같지 않다. 사람의 목소리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고, 목소리를 인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육성도 아닌 전화상의 목소리가 또다시 영화의 음향장치를 거쳐서 우리의 청각기관에 도달되었을 때 그것이 실제상 목소리와 얼마나 다를지 측정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영화를 보면서 일부러 집중해서 그놈의 ‘목소리’를 청취했지만 영화를 본지 며칠이 지난 나는 지금 그 목소리를 그대로 듣는다고 해도 양자의 동일성여부에 대해 10%의 가능성도 확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상상해 보자, 공소시효가 아직 진행중이고, 그놈의 목소리와 동일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가 범행을 부인할 경우 법정에서 그 목소리의 동일성만을 가지고 그에게 유죄를 인정할 수 있는지. 대답은 단연코 아니올시다이다.

 나아가 그렇게 희미한 목소리에 대한 지나친 신뢰는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목소리가 매우 큰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잘 식별될 수 있다고 해도 우연히도 그와 비슷한 목소리를 가진 자가 주변에 있다면 그 자는 엉뚱한 의심의 눈길을 받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토록 쓸모없는 ‘그놈의’ 실제 목소리에 대한 감독의 과도한 집착 때문인지는 몰라도 사건 당시 ‘그놈’의 통화상대방이었던 아이의 양육여성이 사생활침해 등을 이유로 영화에 대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제기한 상태까지 와 버렸다.

그놈 목소리의 유용성

 백걸음 양보는 언제나 미덕이다. 영화도 영상을 도구로 한 텍스트일진대 모든 텍스트 해석자는 선의의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해석자의 기본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영화, ‘그놈 목소리’도 자식을 잃은 개인적 차원의 고통을 사회적 차원의 분노로 승화시킴으로써 사람들의 공분을 표출시킬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해석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뿐만 아니라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는 형호군의 부모가 겪은 고통을 나눌 수 있는 뜨거운 부성애와 모성애로 가득 차 있다.

 그 때문에 어두운 영화관에서 눈물을 적시는 자식가진 부모들은 ‘그놈 목소리’에 소름끼쳐 하면서도 ‘범인필벌’을 머릿속에 각인시킨다. 이러한 감정적 태도가 이성적 차원으로 승화된다면 이는 ‘공소시효폐지운동’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이제 ‘그놈 목소리’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붙을 수 있다. 이 영화는 공소시효가 완성후에 개봉되었지만 사실은 공소시효폐지를 공론화하려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제작되었다라고. ‘그놈 목소리’가 개봉된 뒤 우리 사회에서는 다시금 공소시효존폐론의 논쟁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위기에 처한 공소시효제도

 공소시효제도란 어떤 범죄사건이 일정한 시간의 경과로 형벌권이 소멸하는 제도이다. 우리나라에서 살인죄의 공소시효기간은 15년이고 그 밖의 범죄에 대해서는 범죄의 경중에 따라 10년, 7년, 5년, 3년, 2년, 1년 등이 공소시효기간으로 정해져 있다. 공소시효제도의 취지는 크게 두가지로 설명된다. 첫 번째 이유는 법적 안정성과 신뢰의 보호 때문이다. 범인이 누군지 알 수 없거나 범인을 알아도 신병을 확보하여 재판에 회부할 수 없어서 범인이 처벌되지 않는 상태가 일정한 기간 경과할 경우 그 과거의 사실상태를 존중하여 범인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법적 평화에 기여하고 도망다닌 범인도 죄값을 일정하게 치렀기에 이제는 처벌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신뢰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로는 합목적성을 든다. 범죄의 발생 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증거가 소멸하게 되어 수사에 어려움이 있고, 지나치게 오랫동안 국가의 수사력을 범인검거에 동원하는 일 역시 국가적 손실이 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국가업무의 효율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소시효제도는 일정한 필요에 따라 정책적으로 생겨난 제도이지 사물의 본성에 따른 당연한 제도라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범인을 알아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형벌권이 소멸되어 처벌할 수가 없다는 공소시효제도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모순을 안고 있다. 더 나아가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범죄가 공소시효 제약 때문에 영원히 묻힌다는 것은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데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과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낳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나는 공소시효제도는 정의의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에 의해 재정비되어야 할 법제도라고 생각한다. 특히 국가기관에 의해 행해진 범죄의 경우에는 공소시효제도가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공소시효는 원래 국가의 형벌권행사에 일정한 한계를 두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기관 스스로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혜택을 주는 것은 제도의 본래적 취지에도 반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사회에서는 ‘수지김 사건’이나 ‘인혁당사건’ 그리고 많은 의문사사건 등에서 진실을 고의적으로 왜곡한 경우나 사건을 조작하고 은폐한 경우도 공소시효의 제도적 취지가 악용되고 있어서 이 제도의 타당성과 실효성에 대해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미 외국의 입법례는 공소시효제도를 점차 축소해가는 경향에 있다. 살인죄의 경우 독일은 30년, 일본은 25년, 미국은 공소시효가 아예 없다. 뿐만 아니라 국제연합은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를 예방하기 위하여 이미 1968.11.26. 총회에서 국제법상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하여는 공소시효기간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최근에 발족한 상설 국제형사법원 역시 살인이나 강간, 고문 등 일정한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고 있다.

잃어버린 자에게로 시선집중

 하지만 공소시효제도가 폐지되거나 정의의 시효제도로 탈바꿈된다고 하더라도 이땅의 모든 범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모든 범죄자가 남김없이 처벌되는 것도 아니다. 미제사건은 물론이고 드러나지 않은 채 은폐되어 있는 사건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이러한 마당에 범죄자를 처벌하지 못하여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를 공소시효제도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공소시효제도의 폐지는 범인처벌의 가능성을 높이기는 하지만 범죄로 인해 생명, 신체, 자유, 명예, 재산 등을 잃어버린 피해자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거나 치유하는데 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원시적인 복수와 감정적인 만족감을 충족시켜줄 범인처벌에 앞서 현대 복지국가의 법과 제도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은 범죄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당사자인 피해자이다. 국가가 범죄의 피해자를 도외시하고 범인처벌에만 주력한다면 범죄문제를 온전히 해결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범죄를 국가의 공적 질서 내지 법률의 위반이라고 정의할 경우 범죄문제의 해결의 당사자는 국가와 범죄자이다. 하지만 범죄는 피와 살을 가진 구체적인 사람, 즉 피해자에 대한 침해이기도 하다. 따라서 범죄문제의 해결의 장에 피해자를 중심인물로 넣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놈 목소리’가 주는 메세지

 영화, ‘그놈 목소리’의 영상은 우리에게 범죄개념의 변화(법률위반으로서의 범죄개념에서 피해자인 사람에 대한 손상 내지 침해로서의 범죄개념에로의 변화)를 읽어내도록 이끈다. ‘그놈 목소리’의 기괴한 웃음소리는 범죄에 대한 대응수단의 변화(범죄자에 대한 처벌에서 피해자에 대한 치유와 회복)를 가져오도록 촉구한다. ‘그놈 목소리’가 내는 그로테스크한 웃음은 비록 범인을 처벌할 수는 없게 되더라도 피해자의 고통과 상처(트라우마)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할 수 있도록 법정책을 바꾸어 가도록 재촉한다. ‘그놈 목소리’가 던지는 화두는 범인을 처벌하지 못하게 하는 공소시효가 가해자에게는 행운의 시간이고 국가에게는 무심한 시간이지만 피해자에게는 고통의 시간임을 상기시켜 준다.

 바로 이러한 의미있는 메시지 때문에 ‘그놈 목소리’는 그 제작의도의 불투명성에도 불구하고 봐줄만한 영화가 되고 있다. 범인에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피해자들과 함께 질식할 듯한 시간을 함께 하면서도 영화, ‘그놈 목소리’의 지루한 시간은 견뎌낼 만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유괴범이 요구하는 몸값(랜섬)을 과감하게 범인을 잡은 현상금으로 내거는 속시원한 아버지를 설정함으로써 피해자의 공분을 환상적으로 폭발시키고 있는 영화, ‘랜섬’보다 ‘그놈 목소리’에 더 애착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듯이 사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적이다. 바로 그 때문에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즐겨찾게 되는 프로가 ‘뉴스’인지도 모르겠다.

편집 ㅣ 성균웹진 김동선 (dsironz@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