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이야기'
- 43호
- 기사입력 2003.09.04
- 조회수 7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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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선임문제를 둘러싸고 전국의 판사 150여명이 '인터넷 연판장'에 서명에 '연공서열 위주의 대법관 선임문제'를 지적하며
사법개혁을 촉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판사, 그 중에서 대법관은 그 임명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떠들썩할 만큼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입니다. 판사는 법률실무를 담당하는 대표적인 직역으로서 검사, 변호사 등과 함께 법조삼륜(法曹三輪) 가운데 하나의
바퀴에 해당하며, 헌법상 사법권을 행사하는 국가기관으로서 '법관'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사법권은 구체적인 사건에 있어서 당해
법률 또는 법률조항의 의미·내용과 적용범위가 어떠한 것인지를 정하는 권한, 즉 구체적인 법령의 해석과 적용권한을 말합니다.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의 권한입니다. 사법권은 특히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주고, 개인의 자유를 수호하기 때문에 모든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합니다. Ⅱ. 신이여, 도와주소서 판사가 하는 가장 주된 업무는 재판에서 법을 적용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법이 적용될 '사실'을 확정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실이 확정되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법을 적용할 수 없는데, 과거에 발생한 사실을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다시금 재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 일은 거의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특히 민사재판의 원고나 피고, 형사재판의 검사나 피고인은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을 사실을 몰고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실이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로 확인되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개념의 한 정의을 음미해 봄직 합니다: "사실이란 무엇인가? 사실이란 '사실적'이기 위해서 무엇을 취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힘을 가진 자들의 작업의 산물이고, 그러한 힘을 가지지 못하고서 주어진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들의 어쩔 수 없음의 결과물이다"("What are facts? 'Facts' are products of the work of those have a power to define what is to be taken to be 'factual' and of the willinglessness of those have no such power and to accept the given fact"). 이러한 차원에서 보면 재판과정에서 확정되는 사실은 실제로 발생한 사실, 즉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재구성된 사실, 혹은 짜맞추어진 사실이 그대로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허다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사실확인절차를 합리화하여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예컨대 살인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는 수사기관인 경찰관과 검사는 총력을 다해 범인을 밝혀내고 증거를 수집하는데, 이때 수사기관이 해서는 안 되는 사실확인방법과 허용되는 사실확인방법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는 범인에 대해 그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하여 그 사건이 형사재판에 회부되면 검사가 주장하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다시 한번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에서 범인으로 몰린 피고인이나 그의 변호인은 항변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검사나 변호인이 내세우는 증인의 의견을 청취하기도 합니다.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위증죄도 존재하며, 법정에서 제출되는 여러 증거들이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갖가지 엄격한 기준이 마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발생한 사건의 진위여부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자는 바로 판사입니다. 판사는 여기서 법적으로 적법한 절차를 거친 증거라도 주관적으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자유심증주의). 개인사적인 일이나 굵직한 정치적인 사건 혹은 역사적인 많은 일들에 대해 그 진위를 가려 실제로 발생한 사실만을 사실로서 확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는 판사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 때문에 판사는 신의 역할을 대행하는 자라고도 합니다. 미국변호사협회는 변호사이건 판사이건 검사이건 이 협회에 가입하려면 입회선서를 해야 하는데, 그 선서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신이여, 도와 주시옵소서"로 되어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Ⅲ. 시민이 하는 판사의 역할 하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에서 우수한 실무교육을 받았다는 점과, '법률'이 아닌 '사실'문제에 대해 올바른 지식과 판단력을
갖추는 일은 별개의 일입니다. 판사는 법률전문가이기는 하지만, 사실문제에 대해서는 교육받고 공부한 바가 없습니다. 법과대학에서도
법률지식을 주로 공부하고, 사법시험에서도 이 법률지식을 테스트하는 일이 주된 일입니다. 하지만 법률을 해석하여 적용하기에 앞서
확정되어야 할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면, 판사가 적용하는 법률은 잘못된 법률이고, 그로 인해 사건의 당사자들이 입는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Ⅳ. 판사들이 더 해야 할 공부 "우리나라
판사들이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좀 알아야 판결도 제대로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이는 올해 7월 12일 서울지법 형사합의 23부가 2000년 초를 뜨겁게 달궜던 총선시민연대의 지도부에 '유죄' 판결을 내린
데에 대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문운동가인 박원순 변호사가 내뱉은 말입니다. 특히 이 판결은 법원이 '유권자 운동'에 대해 '현행'
선거법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법률이 그 사회의 제반 갈등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기능을
하는데, 그 법률은 갈등상황을 해결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법률은 건설현장에 그대로
주입하면 되는 레미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적용자의 철학이나 가치인식에 따라 적절하게 해석되어야 적용될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 법률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정치적 역사적 철학적 문화적 맥락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법률적용자는 법률을 대신하여 말하는 입 혹은 자동판매기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가치철학에 따라 법률을
새롭게 해석해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판사는 역사의식도 가져야 하고, 뚜렷한 세계관도 가져야 하며, 우리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에
대한 나름의 평가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의 선량한 일반인이 가지고 있는 평균적인 정서를 따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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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법과대학 김성돈 교수
편집| 스큐진 이명우 기자(imssi2000@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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