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을 추억한다 - 영화 '살인의 추억'

  • 87호
  • 기사입력 2005.07.28
  • 취재 황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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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마술의 현장과, 영화 살인의 추억

한때 회자되던 유머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경찰수사력을 측정하는 국제 경쟁대회가 개최되었다. 쥐를 가장 먼저 잡아오는 팀이 우승하도록 되어 있는 시합에서, 한국 경찰팀이 가장 먼저 쥐를 잡았다고 보고하였다. 확인해 본 즉, 데려다 놓은 것은 쥐가 아니라 곰이었다. 주최 측에서 실격이라고 선언하자, 한국 경찰팀은 반발하며 주최 측이 직접 심문해보라고 했다. 주최 측이 곰에게 물었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고 눈두덩이 까지 시퍼렇게 멍든 곰이 말했다. “저, 곰이 아니라 쥐예요, 쥐!”』

요즘은 이 이야기가 빨리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 많을지 모른다. 경찰관계자들은 이 유머에 대해 얼굴을 붉히며 얹잖아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곰들을 쥐로 둔갑시키는 마술 아닌 마술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그러한 마술의 기법을 정밀하고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폭력의 현장을 보여주는 영화, 살인의 추억

영화, 살인의 추억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무려 10명의 희생자를 낸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로만 알려져 있다. 화성연쇄살인은 세계 100대 살인사건에 포함되고 있지만 아직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여 영구 미제처리 될 가능성이 높은 실제사건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제사건을 중심축으로 하여 구성된 허구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통해 화성연쇄사건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우리 모두를 영화 속의 인물들에 천착하여 나름대로의 추리력을 동원하게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 때문에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실제 인물들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으며, 잊혀져가고 있는 우리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여러 가지 후일담을 접하게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영화의 감독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들은 바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 이 영화의 원작이 '날보러와요‘라는 희곡작품이라고는 알고 있지만 그 연극을 나는 보러 가지도 못했다. 2003년에 개봉된 영화 살인의 추억이 그 자체로 우리의 추억이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시점에 나는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그 속에서 나는 당시 우리 사회에 얼룩져 있었던 국가폭력의 진한 자국을 추억해 낼 수 있었다.

국가폭력과 개인폭력의 이중주, 살인의 추억

사실이지 ‘살인의 추억’의 영상에 차고 넘치고 있는 것은 살인의 현장이 아니라 국가폭력의 현장이다. 장면마다 주먹질하고, 발길질하고, 잠재우지 않고, 발가벗기며, 공중에 매달고 있는 주체는 언제나 국가 공권력으로 나온다. 시위현장에서의 무지막지한 진압도, 심지어 영화 속의 뉴스에 흘러나오는 여성피의자의 성고문도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심지어 요란한 싸이렌을 울리며 행해진 야간등화관제훈련 조차도 공포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우리를 길들이려는 변장된 국가폭력일지도 모른다. 전두환 군부독재정권의 시퍼런 서슬이 휘둘려지고 있을 당시, 모든 전투경찰들이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시위진압에 동원되고 없어서 지원세력 한명도 얻어낼 수 없었음을 이 영화는 전하고 있다. 현실세계에서도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 대표되는 총체적 국가폭력의 바로 그 시점에 경기도 ‘화성’에서는 전국을 공포분위기로 몰아넣는 또 다른 차원의 개인폭력(연쇄살인사건)이 한국사회의 국가폭력사태와 암울한 이중주를 연주하고 있었다.

폭력의 원천과 합법화된 폭력

폭력은 살인의 추억시점 그 이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으며,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폭력은 경기도 화성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과 영국 런던, 아프리카 어느 오지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또 어디선가 일어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무력충돌중인 국가리스트에는 알파베트 순으로 알바니아(A)에서 시작하여 짐바브웨(Z)에 이르기까지 68개국이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간은 폭력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인류는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들 한다.

인간은 폭력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타고난다고 하는 과학적 증거가 많다. 때문에 오늘날의 과학은 '태어난 아기가 어떻게 폭력을 학습하게 되는가' 하는 물음보다도 오히려 '천성적으로 폭력인자를 타고 난 인간이 어떻게 해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가' 하는 물음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 상태에서의 폭력을 감소시킨 데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국가만이 폭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법제도의 힘이라고 하는데 반대할 견해는 없는 것 같다.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의 등장에 따라 중세이후 유럽사회의 살인사건 발생률이 100분의 1로 줄었다고 한다.

만약 국가가 없고 따라서 경찰이 없어지고 검찰이 없어지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초래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잡아먹는 늑대가 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리바이어던(Leviathan; 거대야수=국가)은 ‘불결하고 잔인하고 무뚝뚝하지만’ 우리가 신뢰를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권력이 되어 버렸다.

어긋난 폭력의 고발, 살인의 추억

그러나 우리가 신뢰한 국가(리바이어던)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 사례는 무수하게 발생하였다. 국가의 형벌권 혹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은 도처에 존재한다. 20세기에 들어서만 해도 전 세계적으로 자신의 국가에 의해 살해된 국민의 수가 1억7천만에 달한다고 한다. 국가에 의한 살인은 20세기의 독재정치의 유물만이 아니다. 국가에 의한 폭력은 21세기에도 카메룬 등지에서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드물지 않은 현상이다. 그래서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은 국가폭력의 관성작용을 제어하기 위해 우리가 국가에 양도한 폭력의 독점권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불가결함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악랄한 고문장면이나 어처구니없는 수사 장면들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러한 장면묘사는 바로 우리가 합법화된 폭력의 행사주체에 보낸 기대를 실추시킨, 빗나간 국가폭력에 대한 고발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묘사가 얼마나 전파력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스스로 과학수사를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서형사(김상경 분)가 자신의 눈만 믿고 직관에 의존하는 박형사(송강호 분)와 닮은꼴로 바뀌어간 것은 일그러진 국가 폭력의 반어적 표현이고, 폭력수사로만 일관했던 조형사(김뢰하 분)에게 닥친 다리 절단이라는 반대급부는 잘못된 국가폭력의 직설적 표현이라고 읽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나 혼자만의 독단적 해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 때문에 나는 최근 경찰과 검찰간의 ‘수사권조정’문제 - 애초에 수사권독립이라는 논제로 시작되었다가 담론의 논제를 이렇게 변용시킨 것에도 두 기관의 교묘한 전술이 드러나고 있지만 - 와 관련해서도 합법화된 국가폭력에 대한 통제장치의 강화라는 측면이 도외시되고 있어서 양측에 못마땅한 점이 많다. 아직도 경찰은 피의자에 대한 직관수사나 유혈사태를 낳는 폭력적 시위진압이 시민의 인권에 대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고, 검찰은 국민의 안위와 질서는 내손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그들만의 신화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폭력을 감소시킬 방법 한 가지, 새로운 희망

폭력이 반드시 원시적이고 비합리적인 충동만은 아니다. 그러나 폭력은 제거되고 감소되어야 할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이자 결과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폭력을 진압하고 예방하는데 있어 민주적 리바이어던 보다 효과적인 수단도 아직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날 법질서로 겹겹의 화려한 옷을 입은 리바이어던도 결코 완벽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폭력이나 폭력적 위협을 가지고 폭력과 싸우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폭력은 이기적이고 이성적인 사회적 동물이 활동하면서 발생하는 거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인간이 사는 곳에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것과 폭력을 행하지 않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따라서 폭력을 감소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법과 질서에 의해 사후적인 처벌방법보다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전에 폭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에서 찾아야 한다.

폭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포기하는 일의 이점이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폭력의 메커니즘에서 출발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의 메커니즘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오늘날의 인지과학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기적인 본성을 가진 인간은 폭력을 통해 이득을 얻어내더라도 인간본성의 인지요소에 의해 더 높은 차원으로 한걸음 올라서서 결국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보다 합리적임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에 대해 생각을 할 뿐 아니라, 그 생각에 대해 생각하고, 생각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실험하고 체득한 많은 갈등해결의 진보적 방법들 역시 - 법치에 복종하는 것, 서로 합의하여 화해하는 방법을 찾는 것,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을 평등한 눈으로 보는 것 - 이와 같은 인간의 사고능력, 즉, 개방성을 가지고 합리성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를 오늘날의 인지과학에서는 조합적/회귀적인 사고능력이라고 한다)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인간본성에 내재한 폭력적 본능을 인지적 개방성을 발휘하도록 방법이 폭력감소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이러한 방법을 각 개인이 지속적으로 발휘하게 되면 폭력에 관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도 점차 변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된 본성은 우리 각자의 유전자를 통해 우리의 후손들에게 대물림될 수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과거시점의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폭력에 대한 본능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폭력의 본능정도와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면...

편집 ㅣ 스큐진 황예진 학생기자 (ooohyj@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