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 - 사회적 편견과 떠나는 이의 아픔

  • 93호
  • 기사입력 2005.10.01
  • 취재 황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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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영화 속의 사건, 형법이론의 학습교본

가끔씩 직업의식을 발동케 하는 영화가 있다. 등장인물들의 행위가 형법상의 범죄에 해당하는 영화가 그런 영화이다. 특히 우연적 요소가 겹쳐서 사건이 복잡하게 얽히는 경우는 연구하는 자세가 더욱 강화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메그놀리아’는 첫 장면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상대방을 향해 장총을 겨냥하는 지경까지 가는 부모가 있다. 그 집의 아들은 그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나버리도록 장총에 실탄을 장전해 두고 자신은 고층 아파트의 옥상위에서 뛰어내린다. 그런데 옥상에서 떨어지고 있던 아들의 가슴에 총알이 박힌다. 부부가 평소처럼 싸우던 중에 예기치 않게 발사되어 버린 총알이었다. 이러한 시츄에이션은 교과서 사례보다 더 가공할 만한 학습효과를 준다.

한 젊은 여자가 호텔방에서 이미 주검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여러 명의 등장인물들이 각자 이 주검을 향해 살해행위를 감행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영화, ‘박수칠때 떠나라’는 형법학도인 나에게 ‘메그놀리아’ 보다 더 나은 학습교본으로 다가왔다.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가 제공한 사색의 단초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는 미모의 한 여성 카피라이터의 죽음을 캐는 수사과정이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형사와 검사는 누가 진범이고 살해동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주력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전설이 된 검사도 관록 있는 배테랑 형사도 진범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한다. 용의자가 범행현장에서 체포됨으로써 단순해 보였던 사건의 실체가 점점 미궁에 빠져들지만 무당까지 가세한 굿판의 힘을 빌려서야 겨우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다.

진실찾기에서 인간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것으로도 보여 지는 이 영화는 풍자극도 블랙코미디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스릴러나 미스테리물 또는 수사극도 아니다. 때문에 이 모든 장르들을 체계 없이 뒤섞어서 여러 개의 우연들을 한 여인의 죽음에 교집시키고 있는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있는가를 알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마침내 머릿속에서 한 개의 검색어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개인의 생물학적 죽음의 차원 배후에 있는 ‘사회적 죽음’이라는 단어였다. 영화 속의 수사관들은 물론이고 수사과정을 생중계하는 방송국의 담당 피디, 심지어 생방송시청자들을 통해서도 나타내 보여주고 있지 않은 이 영화의 메시지가 사회적 편견이 초래한 죽음과 그 망자의 아픔을 헤아리기가 아닐까 하는 데에 까지 생각이 미쳤다.

죽음의 법적 요건과 죽음의 철학적 의미

그러나 나는 이 영화 속의 ‘죽음의 의미’를 사색하라는 천재 감독의 수준 높은 요구에 쉽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죽음의 의미 보다는 죽음에 이르게 한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분석과 그 행위의 범죄의 성립요건충족여부 그리고 범죄성립요건을 규정하고 있는 형법의 여러 개념들을 해석하여 이를 체계적으로 정돈 배치하는 일만에 천착해 온 내게 그런 차원 높은 사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그러나 몇 가지 들은 풍월은 있다. 삶을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동료 사형수가 차례로 사형대로 호명되어 가는 것을 보는 일에 비유하고 있는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도 있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죽음을 전해 들으면서도 어떤 죽음이든 드러낼 수 없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어설픈 추측도 해 보았다. 하지만 떠나는 자의 고뇌와 삶의 무게가 어떠한 지에 대해서는 진정성을 가지고 그들의 생각을 추수해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면서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가 내게 부여한 미션, 죽음의 의미에 대해 사색을 강요받아 오던 나는 마침내 영화 속에서 한 여인을 죽음으로 내몬 진범을 찾아내었다. 그 진범은 다름 아닌 그 여인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질시이고, 그러한 사회적 비난과 질시를 가능케 한 것은 일반성 내지 보편성이라는 사회적 잣대이다.

보편성과 특수성, 정상성과 비정상성

어느 사회이건 일반성 내지 보편성을 벗어난 특수성을 인정하는 일에는 매우 인색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법도 그러한 일반성 내지 보편성을 표준화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일반성 내지 보편성을 담은 법을 통해 타인에 대해 예측 가능한 행위기대를 할 수 있고, 그러한 기대를 배반하는 특수한 행위가 발생하면 그러한 행위 기대(법)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 기대배반자를 비난함으로써 일반성과 보편성을 수호한다. 미셀푸코는 광기의 역사라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기준에 따라 정상성과 비정상성을 준별하여 온 계보를 추적하였다.

그의 일차적 연구과제는 무엇보다도 사회가 어떻게 정상인과 비정상인을 구분해 놓고 그 구성원들을 통제하며 길들이느냐 하는 것이었다. 비정상성에 대해 사회는 금기와 비난으로 대응하여 왔고, 법적으로 금지의 대상이자 불법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애꾸의 나라에서는 두 눈이 성한 사람이 비정상이다’라는 단 한마디의 말로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만다.

영화,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한편으로는 아홉 번의 칼질로도 모자라고 불길로 태워 죽여도 부족한 그 여인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다름 아닌 사회의 일반적인 기대에서 벗어나는 비정상성적인 사랑이었다. 그녀를 죽게 만든 것은 수차례의 칼질도 아니고 뜨거운 화염도 아니었다.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정상성이라는 이름의 시선이 비정상성에 대해 내리꽂은 편견의 눈초리이고, 보편성이라는 목소리가 특수성에 대해 퍼부어대는 지독한 독설이다.

편견의 눈초리와 독선적인 욕설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자에 대해 사회는 이해도 하지 않으려 하고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군중심리는 보편적인 행위기대를 지키기 위해 비난 일색이 되어 희생양 프로젝트에 착수할 뿐이다. 이쯤이면 논리필연적인 결론은 말하지 않아도 자명해진다. ‘떠나라! 그러한 사태가 도래하기 전에, 너의 비정상성이 들키기 전에, 너를 지켜온 파수꾼이 적에게 매수되기 전에, 아직도 네 주변에서 박수갈채가 조금이나마 들리고 있을 때. 더 늦기 전에 떠나라.’

모범사례에 대한 법적 판단

‘박수칠 때 떠나라’는 영화의 제목과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박수갈채는 고사하고 악의에 찬 비난으로 일관한 등장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형법적 평가만큼은 자신 있는 내 전공영역이다. 먼저 죽은 사람을 산 사람인 줄 알고 칼로 찌른 자들의 행위는 형법적으로 살인미수가 된다. 살해하려는 주관적인 태도로서 고의가 있고 실행행위로 나아갔으나 사망이라는 결과가 그러한 행위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행위자가 대상의 착오를 일으켜 원하는 결과발생이 애당초 불가능한 것임을 모르고 행위한 경우를 법은 ‘불능미수’라고 한다. 형법은 불능미수가 ‘위험성’이라는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처벌조차 하지 않는다. 이 위험성이라는 요소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학설이 주장되고 있다. 영화 속의 행위자는 어떤 학설에 의하더라도 위험성은 인정되어 결국 행위자는 형법적으로 처벌되는 범죄가 된다.

다음으로 피해자를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간음 혹은 강제추행을 하면 강간죄 또는 강제추행죄가 되지만, 그러한 상태를 야기할 당시 피해자가 이미 사망하였던 경우에도 역시 위와 같은 형법이론에 따라 강간죄 또는 강제추행죄의 미수가 되고 위험성도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불능미수로 처벌된다. 마지막으로 방화하여 살해하려고 피해자가 있는 곳 까지 갔으나 이미 피해자가 사망한 것을 알고 되돌아 온 행위에 대해서는 살인의 실행의 착수에 이른 것이 아니므로 살인미수죄가 될 수 없고 살인예비죄가 인정될 수 있을 뿐이다.

편집 ㅣ 성균웹진 황예진 학생기자 (ooohyj@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