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려한 휴가’와 그 뒷 이야기

  • 139호
  • 기사입력 2007.09.23
  • 취재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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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로스쿨의 영화들> 저자

영화가 보여준 불편한 진실

진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지구온난화를 부르는 환경문제의 진실이나 도심의 지하도에서 신문지를 이부자리로 삼아 고단한 몸을 누이고 있는 노숙자들의 모습등은 외면하고 싶을 만큼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아무리 불편한 진실이라도 우리의 눈과 머리와 가슴을 채우는 또 다른 목전의 일상이나 사건 및 우리의 생각에 의해 밀려나기 마련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주는 ‘518광주사건’의 진실도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광주의 진실 역시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실의 일에 의해 잊혀져가고 만다.

불편한 진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우리네 유전자의 자연선택의 결과일지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잊혀져 가는 518광주사건의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영화, ‘화려한 휴가’는 망각을 추구하는 인간본성에 설계된 프로그램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침투된 ‘바이러스’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본 관람자들이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는 틈을 타서 내가 보유하고 있는 518광주사건과 관련한 또 다른 바이러스를 침투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말해 영화, ‘화려한 휴가’를 이미 보았거나 아직 보지 않은 자들로 하여금 518광주사건의 불편한 진실을 다시 한번 정면으로 응시하게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편함의 양적 변화가 유전자의 ‘진화’라는 질적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를 가지고.

518광주사건에 대한 법적인 최종결론

그동안 518광주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518광주사태\'를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폭도\'를 \'민주화유공자\'로 바꾸었다. 법적 렌즈를 통해 바라본 518광주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1996년 4월 17일 우리나라 최고법원인 대법원이 ‘518광주사건’과 관련하여 내린 역사적인 판결문속에 들어있다. 그 판결문에는 전두환 전직 대통령이 ‘518광주사건’의 주모자로 확인되어 있고, 그에 대해서는 형법상 내란죄 및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되어 사형이 선고되어 있다. 하지만 518광주사건에서 자식잃고 부모잃은 피해자들의 삶에는 여전히 어두운 그늘이 뒤덮여 있는 반면, 극형과 중형을 선고받은 전두환외 다른 가해자들은 어느 사이인지 자유의 몸이 되어 호가호위를 하고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침묵하고 있는 518광주사건의 이전과 이후의 불편한 진실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가.

1980년의 518광주사건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후 이른바 12·12군사반란에서 시작된다. 대법원에서 내란죄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정된 사실관계에 의하면 전두환등 신군부세력은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1980. 5. 초순경부터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국기문란자, 권력형부정축재자 등 수사계획\'을 마련하여 이를 검토?추진하기로 모의하고, 그 계획에 따라 1981. 1. 24. 비상계엄의 해제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내란행위를 하였다. 광주시위진압도 바로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국회의사당 점거·폐쇄, 보안목표에 대한 계엄군 배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운영, 정치활동 규제 등 일련의 행위와 함께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 나아가 1980년 5.26. 23경에부터 5.27 이른바 상무충정작전에 따라 여단특전대가 광주에 침투하여 벌인 일련의 살상행위는 광주시위를 조속히 제압하여 시위가 다른 곳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지 아니하면 내란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바꾸어 말하면 집권에 성공할 수 없는 중요한 상황이었으므로, 광주재진입작전을 실시하는 데에 저항 내지 장애가 되는 범위의 사람들을 살상하는 것은 내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직접 필요한 수단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계엄군들로 하여금 광주시민들을 살상하게 한 전두환 등 피고인들의 행위는 형법상 내란목적살인죄에 해당한다는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518광주사건에 대한 이와 같은 법적인 최종결론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1988년 국회청문회에서부터 5·18광주사건의 진상규명이 처음으로 시도되었으나 무산되었고, 그 후에도 5·18 피해자와 단체들이 수차례에 걸쳐 고소?고발했으나 검찰은 이른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기소유예와 공소권 없음의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518광주사건의 진상규명은 1995년 10월 19일 전직 대통령 노태우의 비자금 사건에 대한 의혹이 폭로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부패정권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던 12·12 쿠데타 및 5·18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졌다.

이에 518광주사건의 가해자들의 처벌에 대한 최대의 걸림돌인 공소시효(15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95년 11월 ‘역사 바로세우기’를 선언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헌법재판소도 이미 경과한 공소시효의 적용을 배제하는 특별법의 태도가 헌법상 소급금지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와 함께 518광주사건에 대한 기소불가입장론을 전개해 왔던 검찰의 태도도 180도 바뀌었다. 검찰은 1995년 12월 3일 군형법상의 반란수괴죄를 적용하여 전두환을 위시한 1980년 당시의 신군부측 핵심인사들을 구속 기소하였고, 법원은 1996년 3월부터 시작하여 1심 28회, 항소심 12회 등 모두 40회에 걸쳐 공판을 진행한 후 마침내 대법원에서 피고인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각각 사형과 징역 12년을 선고하였다.

원점으로 돌아간 정의의 시계바늘

여기까지는 좋았다. 정의가 승리하는 것 같았고, 역사가 바로 세워지는 듯했다. 특히 518광주사건의 주모자들에 대한 사법처리의 밑거름이 되었던 특별법의 위헌시비에 관한 논란을 종결지우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읽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였다. “이 사건 반란행위 및 내란행위자들은 우리 헌법질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였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민주주의가 장기간 후퇴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국민의 그 생명과 신체가 침해되었으며, 전국민의 자유가 장기간 억압되는 등 국민에게 끼친 고통과 해악이 너무도 심대하여… (중략) … 집권과정에서 헌정질서파괴범죄를 범한 자들을 응징하여 정의를 회복하여 왜곡된 우리 헌정사의 흐름을 바로 잡아야 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우리 헌정사에 다시는 그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을 위한 헌정사적 이정표를 마련하여야 할 공익적 필요는 매우 중대(하다) … (후략).”

하지만 이상과 같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추상과 같은 법적 판단은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인 1997년 12월 22일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신군부세력과 합종연횡을 한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뒤 특별사면을 내림으로써 각각 사형과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전두환과 노태우는 전격적으로 석방되고 복권되었다. 남의 물건 몇 만원어치를 훔쳐도 몇 년을 감옥살이를 해야 하는 법제하에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정부 공식 발표), 사망 207명, 부상 2392명, 기타희생 987명 (광주민주유공자 등록현황 2003.1.31)으로 집계되는 범죄를 자행한 범인에 대해 내려진 특별사면은 힘들여 세워놓은 정의와 진실의 역사를 일순간 무너뜨리고 말았다.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사면인가

검찰과 법원이 정치권의 영향력 아래에서 518광주사건에 대한 법적인 평가를 내렸고, 정치권은 그 후 다시 특별사면이라는 이름으로 법적인 평가를 무위로 돌림으로써 검찰과 법원을 정치의 꼭두각시로 만들고 말았다. 당시 특별사면의 이유가 ‘국민대화합차원’이라고 하지만 ‘화려한 휴가’의 작전을 명령했던 자가 참회했다는 소식이나, 피해자들과 가해자들간에 화해시도는 여전히 들려오지 않고 있다. 화해하고 화합한 이들은 오직 권력을 나눠 가진 정치인들뿐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사람을 살해한 것이 사면의 대상이 된다면 배가 고파서 도둑질한 자들에게는 굶주린 배를 채워줘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만의 잔치에 의해 특별사면된 가해자들에 대해 양식있는 정치인들이 선거철마다 머리를 조아리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고,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정치인들이 518광주사건의 주모자들인 두전직 대통령에게 국가원로에 포함시켜 자문을 받는 일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518광주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과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화려한 휴가 뒤에 있어야 할 것들

불행했던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이 재조명되고, 잊혀져가고 있는 사건에서 젊은이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주고 있는 영화, ‘화려한 휴가’가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경악이나 슬픔과 안타까운 감정을 일시적으로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서도 안된다.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화려한 휴가를 전후로 한 불편한 진실을 대면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불편한 진실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식과 정의감을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18광주사건 이후의 일들은 청산하지 못한 친일보다 더 부끄러운 현대사의 한 페이지로 남을 것이다. 스스로의 과오를 청산하지 못하는 우리가 일본의 사과를 바랄 수 있는 자격이라도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런 저런 이유에서 518광주사건은 아직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다. 단지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처리’되었을 뿐이다. 문제와 갈등이 해결되려면 해원이 있어야 한다. 해원이 있으려면 적어도 상징적이나마 일정한 절차가 필요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진실과화해위원회’가 했던 것처럼 가해자들로 하여금 직접 참회하고 용서를 비는 절차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 ‘화려한 휴가’가 보여준 광주의 상처와 아픔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