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류서양화가 나혜석 이야기

  • 161호
  • 기사입력 2008.08.02
  • 취재 정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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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민호 교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기록된 여인은 나혜석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동경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하였다는 점에서 그녀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라고 부르는 것 같다. 모든 것이 그렇듯 남이 하지 않은 새로운 세계에 도전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외로운 길이다. 나혜석 역시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불행한 여인이었다.


1)그녀의 일생

그녀는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영리했던 그녀는 진명여자고보를 최우수로 졸업한 후 동경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여성이 유학을 가는 것도, 그것도 미술가를 환쟁이쯤으로 인식하던 때에 미술을 전공한다는 것도 모두 파격적인 그녀의 결단이었다. 그녀는 동경의 조선유학생 잡지 학지광에 이상적 부인, 잡감 등의 글을 발표하는 등의 신여성운동 활동에 적극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문학 동인지 여자계에 경희, 회생한 손녀 등의 소설과 매일신보에 섣달 대목, 초하룻날 등의 만평을 연재하는 등 문학적 창작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었다.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잠시 진명여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사직하고 작품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지식인의 행동을 요구하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그녀를 그냥 둘 리가 없었다. 3.1운동 여학생참가계획을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스물 네 살의 그녀는 김우영과 결혼을 하였다. 아이를 낳고 그림을 그리고, 그녀의 삶은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흘러가는 듯하였다. 물론 1921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개인전을 서울에서 여는 등 그녀의 움직임은 바로 우리나라 미술사를 한 줄 한 줄 채워 가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삶은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는 듯 하였다. 그런데 그녀의 나이 서른이 넘어 남편 김우영을 따라 유럽에 간 것이 화근이 되어 그녀의 삶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남편은 베를린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그녀는 파리에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파리에서 민족대표 33인 중에 하나였던 최린을 만났다. 이들의 짧은 만남은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이를 트집잡은 김우영의 요구로 나혜석은 결국 1931년 서른 다섯의 나이에 이혼을 하게 된다. 불륜의 전력과 이혼녀라는 사회적 편견, 게다가 자녀들로부터의 냉대는 그녀를 점차 파멸로 몰아갔다. 그래도 창작의 열정으로 자신을 버티어 가던 그녀는 집의 화재로 자신의 마지막 버팀목까지 잃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는 행려병자의 신분으로 1948년 생을 마감하였다.

2) 일제강점기, 그 때 당시의 이혼은?

나혜석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 사건은 간통과 이혼이었다. 법학에서도 정말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던 주제 중에 하나다. 간통죄의 존폐를 둘러 싼 논쟁은 단순히 법리적 논의의 수준을 넘어 심각한 성적 대결 양상을 보이다가 지금까지 그냥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나 역시 이에 대한 논의는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나혜석의 남편 김우영은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하였고 그녀는 이혼에 합의하였다. 이혼이란 부부가 혼인관계를 청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부의 문제에 왜 법이 관여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부부관계의 청산은 단지 부부의 문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친권, 재산의 분할, 채권, 채무 등 많은 법률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당사자가 합의에 의한 이혼을 한 경우라도 반드시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제도는 과거에 합의이혼이라는 구실로 남편이 아내를 강제로 쫓아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취지에서 1979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가정법원은 이혼의사확인의 신청이 있는 때에 당사자 쌍방을 출석시켜 그 진술을 듣고 이혼의사가 당사자 모두에게 있는지 여부, 당사자 사이에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는지 여부, 만약 있다면 그 자녀에 대한 친권행사자의 지정 여부 등을 확인한다. 협의이혼의 신고는 가정법원의 확인을 받은 날로부터 3개월 이내에 하여야 한다. 물론 법원의 확인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이혼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법원의 확인을 받았으나 다시 마음이 변한 경우에는 신고를 하지 않으면 아무런 법률적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3) 이혼?

부부 중에서 한 사람만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에는 재판을 통해서만이 이혼이 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에는 법에서 정한 일정한 이혼사유가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대방 배우자가 부정한 행위를 하였거나, 무단가출을 하였거나, 폭행 등 부당한 대우를 하였거나, 3년 이상 생사가 불명한 채 행방을 알 수 없거나, 기타 혼인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중대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소송에서 이혼판결을 받아야만 이혼신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법에서 정한 이혼사유가 없는 한 배우자 중 한 사람만이 이혼을 요구할 경우에는 이혼이 불가능하다.

이혼의 확인을 받거나 이혼소송을 함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위자료 문제이다. 위자료란 정신상의 손해, 무형의 손해 또는 비재산상의 손해에 관한 배상금이다. 결국 이혼에 있어서 위자료란 이혼을 하게 됨으로써 심리적으로 받게 된 충격?번민?슬픔?불명예 등과 배우자의 부정행위?부당대우 등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그 이혼에 책임이 있는 자로부터 피해자가 배상 받는 금전을 말한다. 따라서 위자료는 혼인파탄의 책임이 있는 사람(유책배우자)이 상대방에게 지급할 의무가 있게 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재산분할의 다툼이다. 재산분할을 할 것인지 여부, 그 액수와 방법 등은 당사자의 협의에 의한다. 협의가 되지 않거나 협의를 할 수 없을 때에는 당사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이 재산형성에 대한 당사자의 기여도 등을 고려하여 결정한다. 집에서 살림만 한 주부에 대해서는 통상 40%정도의 기여도를 인정하는 것이 판례의 태도이다. 재산분활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혼인 중 부부가 협력에 의하여 취득한 재산이고 혼인 전에 부부일방이 취득하여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원칙적으로 분할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산도 결혼 후에 상대방이 그 재산의 유지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가치의 감소를 방지하였을 경우에는 그 한도 내에서 분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퇴직금 또는 연금에 대하여는 배우자가 아직 퇴직하지 않고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 경우에는 분할의 대상이 되지 않지만 이미 퇴직하여 퇴직금을 수령한 경우에는 분할의 대상이 된다. 한편 부부일방이 혼인 중 제3자에게 부담한 채무는 일상적인 가사에 사용된 것이 아닌 한 원칙적으로 그 개인의 채무로서 청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끝으로 자녀양육의 문제가 있다. 부모 중에서 누가 자녀를 양육할 것인가라는 문제 역시 원칙적으로는 부부의 협의에 의한다. 그러나 서로 양육을 하겠다고 또는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결국 법원에서 자녀의 연령, 부모의 재산상황, 기타 사정을 고려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법원은 자녀가 어릴수록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라고 보아서 어머니에게 자녀의 양육을 주려는 경향이 있다. 한편 양육권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양육비문제이다. 자녀 양육은 부모가 모두 부담해야하는 것이므로 직접 자녀를 양육하는 쪽에서 직접 양육하지 않는 쪽에 양육비를 청구할 수 있다.

4) 마치며

글을 쓰다 보니 이혼하는 방법과 절차를 소개하는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결코 이혼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이 튼튼해야 사회와 국가가 건강해 진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다. 그러나 불가피하게 혼인의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법에 대한 무지와 사회적 편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혼의 아픔 보다 더욱 커다란 고통을 감내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혼의 방법과 절차, 그리고 자신을 위하여 따져 보아야할 법률적 문제 등을 알려 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여 이 글을 끝가지 썼다. 오해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