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I를 보는것이 불편해진 이유

  • 168호
  • 기사입력 2008.11.15
  • 취재 정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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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경권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의료법무전담교수 · 법무법인 조율 변호사

어릴 적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을 때 우리의 안방은 외국드라마로 넘쳐났다. 방송국과 편성시간은 있으나 이를 메울 컨텐츠가 부족했던 시절 많은 외국 드라마를 수입하였다. 어린 시절 \'마징가 Z\'로 상징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물론 ‘600만불의 사나이’, ‘스타스키와 허치’, ‘원더우먼’, ‘소머즈’, ‘부부탐정’ 등과 같은 미국 드라마를 보며 자랐다. 이들 드라마들은 당시로는 심야인 저녁 10시 이후에 주로 방송되었으나 주말의 황금시간대인 저녁6~7시에 자리잡은 것도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 인기는 물론 커다란 문화적 영향력을 가졌다. 90년대를 기점으로 많은 문화 영역에서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2000년을 넘어서서는 오히려 우리가 만든 드라마가 외국으로 수출되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놀랍기만 하다. 그러나 역사는 순환한다고 하였던가. 요즈음 다시 미국드라마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600만불의 사나이처럼 지금의 젊은 시청자들에게는 프리즌 브레이크나 CSI가 친숙하다. 이들이 국내 드라마를 외면하는 이유는 많겠지만 공략층이 너무 넓은 점이 문제점의 하나다. 한 드라마에 애정관계를 중심으로 코미디적 요소, 스릴러적 요소를 넣으려고 시도하는 과감함을 보일 때도 있다. 어느 유명 방송작가를 만나 얘기해보니 현실적으로 애정관계-주로 삼각관계-가 없는 드라마는 편성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는다고 한다. 물론 탄탄한 구성과 연기력이 뒷받침되면 매니아 드라마로서 인구에 회자되기는 하지만 시청률에서는 저조할 수밖에 없어 어떤 겉모양을 띠더라도 그 내용에서는 사랑싸움이 주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바보상자 속의 검사는 항상 권총집을 차고 연애를 하고, 의대생들도 공부하는 모습은 잠깐에 불과하고 여자랑 사랑싸움하기 바쁘다. 이러다보니 현실감이 떨어져 과거의 낭만, 하지 못했었던 것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주부들이 주시청자가 된다.

이런 국내의 사정을 파고든 것이 철저하게 준비된 시나리오, 좋은 제작환경,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드라마다. 나 역시 바쁜 시간에 드라마를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시간이 있을 때 미국드라마를 주로 보게 된다. 좀 심하게 말하면 대부분의 한국드라마는 아내가 조금만 설명해 줄 경우 1번만 보면 대충 줄거리를 알 수 있음에 반해 미국드라마-특히 CSI-는 방송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그 내용을 제대로 알 수가 없고 집중해서 볼 경우 철저한 시나리오에 감탄을 금할 때가 여러 번이다. 프리즌 브레이크와 더불어 대표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가 CSI(Crime Scene Investigation)다. 어렸을 적 보았던 수사반장의 미국판 같은데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과 정밀한 시나리오는 물론 의외의 반전 등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높다. 라스베거스 시리즈를 필두로 마이애미와 뉴욕의 세 시리즈가 있다. 각 시리즈는 반장역을 맡고 있는 길 그리섬, 호라시오 케인 및 맥 테일러의 성향과 범죄가 발생하는 각 도시의 분위기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시리즈 모두 첨단화된 수사장비 및 수사진의 전문성을 근거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먼저 사건이 발생하면 수사진이 현장에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현장을 보존한 후 시체를 부검실로 보낸다. 부검실에서는 법의학자가 부검을 통해 사체의 특성, 사용된 흉기 및 살인의 특성 등을 분석하게 된다. 다음으로 현장에서 수집된 증거를 바탕으로 첨단화된 장비를 사용하여 용의자를 찾아 심문을 하고 결국 자백을 끌어내는 것이 일반적 과정이다. 이 때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증거를 이용해 용의자를 찾는 과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술이 지문확보 또는 유전자 감식기술이라는 점이다. 수사팀은 연기를 이용하거나 레이저를 이용하거나 얼리거나 하는 여러 방법을 통해 범죄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지문을 확보한다. 다음으로 확보된 지문을 범죄인의 지문이 저장된 프로그램을 거쳐 용의자를 찾게 된다. 또 하나 현장의 혈흔, 분비물, 머리카락 등을 통해 DNA를 확보하고 이를 CODIS(Combined DNA Index System The FBI Laboratory\'s Combined DNA Index System, 미연방수사국 종합 유전자 색인 시스템)를 통해 확인한다. 아무리 첨단수사기법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사람에 의해 살인이 벌어지고 범인을 잡아야 하는 이상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정확한 것은 지문이나 DNA와 같은 생체정보다.

사람의 눈이나 귀는 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나 위와 같은 생체정보는 오류의 가능성이 극히 적어 범인을 확인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이렇다 보니 미국은 범죄인의 생체정보를 모아 저장한 뒤 이를 활용한다. 우리나라도 지문의 경우 저장하여 활용하고 있으나 DNA는 수집하고 있지 않으며 수사기관에서 이를 수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범죄자를 찾는데 이용되는 모습을 드라마로만 본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정보란 대량으로 수집되는 순간부터 남용되거나 악용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따라서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가장 근본적인 대책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은 수집하지 않는 것이다. 잘 지킬 생각만 하지 말고 지킬 필요도 없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뜻이다. 길 그리섬과 그 팀원들, 맥 테일러와 그 팀원들, 호라시오 케인과 그 팀원들이 제 아무리 첨단의 장비를 이용하여 증거를 확보한다 하여도 결국 범인의 생체정보가 없으면 진범을 잡을 수 없다. 드라마 곳곳에 영장을 청구하는 장면이 나와 미국이 우리보다 법치주의가 확립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범죄인의 생체정보를 수집해 두고, 특정 범죄자에게 전자팔찌를 채우고, 관타나모 기지에서 가혹행위를 일삼는 나라가 미국이다.

현재 시행을 앞둔 한미비자면제협정(Visa Waiver Program)은 그 대상이 ‘관광과 상용’에만 국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행자정보공유협정을 포함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본 정보공유협정을 통해 미국은 한국의 사법기관에 대해 여행자의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 미국이 자국민이 아닌 여행 목적의 한국민에 대한 범죄정보를 조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비자면제협정으로 한국민의 자존심을 높였다고 정부는 홍보하였지만 명백한 범죄자가 아닌 사람에 대해 범죄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국내 수사기관에서도 피의자나 내사자의 범죄기록을 쉽게 열람할 수 없도록 하면서 여행객들의 범죄기록을 미국이 요구할 경우 내주도록 하는 협정을 맺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제는 수사기관이나 국정원과 같은 국내 기관으로부터 개인정보를 보호해야 함은 물론 외국기관으로부터도 보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것이 이제는 CSI를 편하게 볼 수 없는 이유다. 여러분들의 개인정보는 안전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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