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유혹' - 처벌하기 너무 힘든 강간

  • 171호
  • 기사입력 2009.01.28
  • 취재 황경주 기자
  • 조회수 5597


글 ㅣ 이경권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의료법무전담교수 · 법무법인 조율 변호사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은 지극히 힘들다. 영화의 흥행이나 드라마의 시청률도 이러한 인간의 예측불가능성으로 인해 전문가들의 예상을 빗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비평가나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작품, 엄청난 규모의 예산이 소요된 영화가 1주일도 못 버티고 상영을 중단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요즘 ‘명품막장드라마’라는 모순적인 신조어가 만들어지게 한 드라마가 있으니 바로 아내의 유혹이라는 드라마다. 톱스타라고 부를 수 있는 연예인도 출연하지 않고, 작품성이 있는 것도 아니며 출연진의 연기력이나 감독의 연출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관련된 내용의 기사도 자주 눈에 띤다. 현모양처였던 한 여자가 자신을 죽이려 한 전 남편에게 복수한다는 단순한 줄거리를 바탕으로 선과 악으로 극명하게 양분되는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선한 자가 핍박받을 때에는 연민의 마음에서, 악한 자의 못된 행동에는 비난의 마음에서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하는 드라마다. 그리하여 시청자들은 욕하면서도 다음 날 어김없이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앉게 된다.

주인공인 은재가 교빈과 불행한 결혼을 하게 되는 계기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교빈이 은재를 강제로 범한 것이다. 일반인들도 너무나 자주 접하는 ‘강간’이다. 솔직히 드라마의 속성상 형법적으로 강간이 성립하는지를 논하기는 힘들다. 강간이 성립하려면 가해자가 폭행 또는 협박을 통하여 피해자를 항거불능의 상태에 이르게 한 후 성교를 가져야 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이를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드라마와 같이 대부분의 강간은 면식범(面識犯)에 의해 발생한다. 부녀자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00발바리처럼 불특정인을 상대로 강간을 하는 경우보다는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단순한 폭행이나 협박에 의해서는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이 가해져야 강간죄가 성립할 수 있다. 여성 단체들은 우리나라의 법원이 이와 같은 폭행, 협박의 정도를 지나치게 까다롭게 해석함으로써 강간죄의 성립범위를 제한한다고 비판한다.

같은 맥락에서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친고죄(親告罪)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한다. 앞서 말하였듯이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여자-대부분의 경우 젊은 여자-가 수사기관을 찾아가 고소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음으로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폭행, 협박이 있어야 하고 그 수준이 피해자가 항거불능에 빠지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여야 한다. 그런데 강간현장은 거의 대부분이 가해자와 피해자 두 사람만 있다. 가해자는 당연히 부인하고 피해자는 당연히 폭행, 협박이 있었다고 주장하므로 사실상 이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이에 대하여 법원은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가해자의 폭행, 협박이 있었는지 여부는 그 폭행, 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피해자가 성교 당시 처하였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사후적으로 보아 피해자가 성교 이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안 된다(대법원 2005. 7. 28. 선고 2005도3071 판결)”고 판단하였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모든 사정을 참작하여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신문을 하는 과정에서 별별 질문들이 쏟아져 피해자의 수치심을 유발하고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 수밖에 없게 된다. 즉 범죄유무를 밝히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권이 침해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단 기소가 되고나면 법정에서 또 한 번 같은 고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강간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드는 일은 개인이 감당하기에 벅찬 것이 사실이다. 더하여 강간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술을 마신 상태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책임무능력을 이유로 무죄를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법원에서 이러한 주장을 잘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이론적으로 명정상태-소위 필름이 끊긴 상태-의 범죄행위에 대하여는 처벌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간죄는 피해자인 여성의 무한한 희생이 있어야 가해자에게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도 과연 은재가 교빈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린 은재가 재벌가의 아들인 교빈을 강간죄로 고소하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할 수 있었을까? 고소를 하였다 하더라도 돈으로 입을 막으려는 시도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일반인들이 법조를 비난할 때 많이 쓰는 문구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다. 강간죄의 경우에도 위 문구가 적용될 때가 많다. 피해자의 고소는 언제든지 취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해자의 합의시도에 굴복할 경우 위 문구는 그대로 타당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강간범죄의 피해자들이 겪게 되는 정신적 충격은 엄청나다. 외국처럼 이들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프로그램이 없는 우리로서는 가해자 아닌 피해자들의 인권과 사후관리에 이젠 사회적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편집 ㅣ 성균웹진 황경주 기자 (icarus7@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