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지식

  • 194호
  • 기사입력 2009.12.09
  • 취재 조재헌 기자
  • 조회수 4032
무제 문서


글 : 한 석 훈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우리나라의 법조인 중 최초의 판사라면 아마도 효봉 스님이 아닐까 한다. 효봉 스님은 일본의 강점기 인 1914년 27세의 나이로 법관시 험에 합격한 후 5년 후, 1919년 평양에서 복심법원(현재의 항소심 법원)의 판사로 부임한다. 그러나 당 시 3.1운동의 애국지사들이 줄줄 이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되고,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일본 정부의 법률을 적용하여 재판을 해야만 했 던 그는 마음의 고뇌를 이길 수 없 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법원으로 출근하던 길에 그대로 처자를 남긴 채, 입고 있던 양복을 처분한 돈으 로 엿판을 사서 짊어지고는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깍고 스님이 되어 치열한 고행과 구도의 길을 걸은 후 나중에는 우리나라 의 선통을 잇는 대선사가 된다.

당시 조선인으로서 법관시험에 합격할 정도이면 대단한 지식인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법관이란 직업 은 평생 부귀와 공명을 보장해 주 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만약에 효봉 스님이 자신이 성취한 법률지식을 자기의 것으로만 여기고 직업의 수단으로만 생각하였다면, 그처 럼 깊은 인간적 고뇌를 하다가 차라리 모든 지식을 내팽개치고 엿판을 짊어질 생각이 들었을까?

내 젊은 변호사 시절의 이야기이다. 처음으로 맡은 형사사건이 식품사범을 변호하는 일이었다.

식품 사범이라면 인체에 유해한 식품을 제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죄질이 불량하다고 보게 되고, 유죄 선고시 그 처벌도 매우 엄하다. 사건 을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법리상 무죄라는 판단이 들었다. 재판부는 내가 주장하는 법해석을 수긍은 하면서도 피고인의 식품제조 방 법이 인체에 유해한 것인지 여부 를 궁금해 하였고, 결국 그 판단을 도와줄 증인을 소환하여 신문하기로 결정하였다.

증인신문이란 통상 과거에 경험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에게 그 경험사실을 진술하게 하는 것이고, 감 정이란 특별한 학식과 경험을 가 진 자에게 그 전문지식이나 그 지식을 이용한 판단을 진술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감정증인신문 이란 특별한 학식과 경험을 기초 로 얻은 구체적인 사실을 진술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 사건의 경우에는 식품제조방법의 유해성 여 부에 관하여 식품분야의 전문지 식을 이용한 판단을 진술하게 하려는 것이므로, 엄격히 말하면 감정에 해당하지만 실무의 편의상 증언 절차에 따라 행하게 된 것이 다.

아무튼 재판부에서는 변호인이 증인을 선정하되 그 진술의 신빙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증인은 국・공 립기관에 재직하는 전문가로 한정 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래서 ‘식품공전’에 수록되어 있는 식품관련 국립 연구원에 재직하 는 어느 박사를 불쑥 찾아가 증인 으로 법정에 나와 줄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박사는 나와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자신이 얼마 전 ‘우지 라면’ 사건으로 한번 수사기관 에 불려 나가 전문가로서의 지식 에 기한 판단을 말하였다가, 그 후 계속 수사기관과 법정에 불려 다녀 고생한 적이 있기 때문에, 도저 히 법정에 나갈 수 없다고 완강하 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우지 라면’ 사건이란 1989년경 당시 라면업계 1위의 매출을 올리고 있던 라면제조 회사가 라면을 튀길 때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하 였다는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사건이다. 그 사건은 그 후 검찰과 변호인 간 에 치열한 법정공방을 거쳐 약 7 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게 되지만, 아마도 위 박사는 그 ‘우지 라면’ 사건에 그야말로 ‘말 한마디’ 하였다가 곤욕을 치른 모양이었 다.

박사의 처지도 충분이 이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무죄 소신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나는 박사 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피 고인에 대한 재판을 해야 하는데, 전문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기소를 한 검사나 재판을 해야 하는 판사도 그러한 전문지식이 없는 데, 만약 전문가가 나서서 말해 주지 않는다면 이 재판은 어떻게 될 것이며, 피고인은 어떻게 되겠습니 까? 증언을 하고 않고는 박사님 의 마음에 달려 있지만, 전문가로서 나서 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이 말에 그 박사는 나를 물끄러 미 바라보더니 젊은 변호사의 진 지한 열의를 느끼셨는지 아니면 전문가로서의 의무감을 느끼셨는지 흔쾌히 증인으로 나서 주셨고, 그 재판에서 피고인은 무죄를 선고받 게 되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나도 그 박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며, 그 박사도 내 이름을 기억 하실 리 없겠지만, 그 박사가 전 문가로서의 자부심과 아울러 자신이 갖고 있는 전문지식이 공공의 것이라는 소신이 없었다면,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평범한 시민 을 위하여 그러한 불편을 감수하였을 리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전문지식이란 동서고금의 선지식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때로는 차가운 골방에서 때로는 고뇌하고 가 난과 싸워가며 만들어 온 수많은 지식에 그저 새로운 빛을 비추거나 조금씩 새로운 지식을 더한 것일 뿐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을 배움을 통하여 체득하거나 조금 새로운 지식을 더하였다고 하여 그 지식을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원래 공인(公人)이란 공직을 맡은 사람을 뜻할 테지만, TV, 영화, 컴퓨터, 라디오 등 매스컴이 발달 한 지금은 공인 개념을 그저 얼굴 이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 라 공공의 이익도 배려하여 활동 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을 공인이라고 부른다면, 지식인은 공인이며 지식인이 가진 전문지식은 공공(公共)의 지식이다.

편집 ㅣ 성균웹진 조재헌 기자 (jjh954@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