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 199호
  • 기사입력 2010.03.29
  • 취재 조재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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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성 재 호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우리와 일본의 관계는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표현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한 이웃나라이지만, 일제 강점기 동안의 고통스런 기억이 정서적으로 일본을 멀리 보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독도를 저희 땅이라고 우길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며칠 전 대통령이 후보 시절 일본 방문했을 때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했다는 언급 때문에 다시 독도 영유권 문제가 이슈화되고 있다. 그러나 독도 영유권과 관련하여 일본 측의 주장을 일축하기 위해서는 감상적 접근이나 감정적 비판에 그칠 것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 확인을 기반으로 치밀한 법리적 대응이 마련되어야 한다. 철저한 법적 분석과 대응 논리의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법리적 관점에서 일본은 3가지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주장, 선점편입하였다는 주장, 그리고 대일강화조약을 근거로 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조선 초기 중앙 정부는 고려 유민들이 모여살고 있는 울릉도를 비우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를 공도정책(空島政策)이라 한다. 울릉도를 비운 결과 독도에도 조선 사람이 가지 않게 되었고, 이 시기에 일본인이 독도 주변 해역에서 어로활동을 한 점 등을 들어 일본은 저희들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 스스로 도항금지령을 내리고 영유권을 부정하는 기록을 갖고 있다. 1877년에는 일본 태정관이 내무성의 울릉도 독도의 영유권 관련 문의에 대하여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는 무관한 지역임을 확인한 바 있다.

실례로 1837년 아이즈야 하치에몬(會津屋八佑門)이 도항금지령을 어기고 울릉도까지 다녀온 뒤 처형당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비록 고문서상의 기록일지라도 일본의 주장은 영유권과는 무관한 것임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라 볼 수 있다. 결국 공도정책에 따른 무인화를 틈타 일본 어민들이 독도 주변 해역에서 어로활동을 한 것에 불과하며, 공도정책 또한 명백히 주권의 발현방법임에도 독도를 무주지라 주장하고 있는데 불과한 것이다. 이는 집주인이 집을 비우고 나가 있는 동안 제3자가 들어 와서 머물면서 제 집이라 우기는 꼴이다.

두 번째 주장은 시마네현의 1905년 고시에 기반한 것이다. 한국이 보다 오랜 원초적 권원을 취득하였다 하더라도 조선조 이래 취해진 공도정책은 사실상의 영유포기에 해당되고, 일본은 도항․기항․어로 등으로 관심을 가져오다가 1905년 실효적 점유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 영토로 편입하였으므로, 그 이후 독도는 일본 영토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로서 일본에 대한 외교적 항의가 불가능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일본은 한국의 무항의를 이유로 일본의 선점 편입조치로 독도 영유권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사람을 결박시켜 놓고 폭력에 저항하지 않았으므로 폭력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더욱이 1905년 시마네현 고시로 일본령이 되었다는 주장은 무주지인 독도를 일본령으로 실효적 지배를 하여 왔다는 종래의 주장과도 모순되는 것이다.

세 번째 일본측은 패전 후 미국과 체결한 강화조약에서 한국에 주권을 반환한 지역으로 독도를 명시하지 않은 점을 근거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한다. 1951년 체결된 대일강화조약은 제2조 (a)항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하는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right), 권원(title)과 청구권(claims)을 포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이 규정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점을 근거로 독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일강화조약의 경우 제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령으로 명시되어 있었으나, 제6차 초안부터 이 부분이 빠지게 되었다. 그 배경은 일본 정부가 당시 외교고문이었던 Sebold를 내세워 미국에 강력히 로비하였고, 그 결과 제6차 초안부터 제9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일본령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 초안은 여타 연합국의 동의를 받지 못하였고, 대일강화조약에서는 독도가 아예 빠져 버린 것이다. 따라서 대일강화조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미국 대통령의 지침과 SCAPIN 677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해석하여야 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다.

더욱이 1950년 연합국의 ‘구(舊)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 에서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물건을 훔친 도둑이 훔친 물건을 다 돌려주지 않고 자기 수중에 있는 훔친 물건을 제 것이라 우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전후 조치는 1910년 이전의 영토 상태로 원상회복하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을사늑약 무렵의 사정이 조선 병합과 무관한 것이라고 억지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독도를 일본 주권 밖에 있는 것으로 명규한 SCAPIN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 또한 모순이다.

이와 같이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행사는 국제법상 명백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본 측이 계속 이슈화하는 것은 독도를 국제적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새로운 시도를 도모하려 한다는 것으로도 분석이 가능하다. 그동안 정부가 독도문제를 조용한 외교라는 관점에서 다루어 왔던 것은 그와 같은 일본 측 저의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판단이 있었으리라. 그러던 것이 2008년 일본 문부성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의 기술 내용을 계기로 적극적 대응수단을 강구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 일본측이 치밀하게 독도 이슈를 제기하고 단계적으로 수위를 높여가는 동안, 우리의 대응태도는 뜨겁게 달구어졌다 순식간에 식어버리곤 하는 대증적 반응이 주조였다. 지금부터라도 차분히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가장 옳은 선택이 될 것이다.

가장 경계하여야 할 부분은 일본의 교과서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의해 일본의 미래세대가 무비판적으로 독도를 일본령으로 알고 자라게 된다는 점이다. 의도적인 일시적 도발보다 교육에 의한 무의식적 확신이 더 무서운 것이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아니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은 사실의 명확한 확인과 국제법 연구를 통한 철저한 대응일 것이다. 목소리는 언제나 크게 낼 수 있지만, 도둑이 다녀간 뒤에 내는 큰 목소리는 공허한 울림과 안타까움만을 키울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편집 ㅣ 성균웹진 조재헌 기자 (jjh954@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