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과학이 공존하는 소설,
엄숭호 교수의 『 유전자 군상(群像)의 뫼비우스』

  • 514호
  • 기사입력 2023.04.28
  • 취재 유영서 기자
  • 편집 김희수 기자
  • 조회수 2991

‘소설 쓰는 과학자’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과학과 문학의 만남은 흥미로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실제 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자신이 다루는 주제를 깊이 이해하고 이를 다양한 문학적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칼 세이건(Carl Sagan)이 있는데, 칼 세이건은 천문학자로서 과학과 철학을 함께 다루는 소설을 주로 썼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엄숭호 교수는 인간의 욕망과 유전자를 중심으로 소설 <유전자 군상의 뫼비우스>를 썼다. 이 소설은 철학과 과학이 함께 가야 하는 존재임을 독자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며 창작산맥신인문학상 소설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이처럼 자신이 꿈꾸는 신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유전자 군상의 뫼비우스> 저자 엄숭호 교수를 만나보자.


Q. 안녕하세요. 교수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2011년도부터 현재까지 성균관대학교 화학공학부에 재직 중인 엄숭호입니다. 미국 CORNELL 대학교에서 생명공학 석∙박사학위를 받고 MIT에서 연구원으로 지낸 후 교원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과학, 환경, 건강 분야의 논문과 칼럼을 쓰거나 국내외 좋은 글들을 발췌하여 회원들에게 소개하고 있어요. 36억 년 전부터 우리 인간의 몸속을 타고 내려온 심오한 유전언어들에 귀 기울여 사회 전반에 누적된 다양한 갈등 속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고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신(新)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지요. 이의 실현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기 위해서 현재도 도서 집필, 연구 및 교육에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Q. 창작산맥신인문학상 소설부문 수상작으로 <유전자 군상의 뫼비우스>가 선정됐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창작산맥’은 문학연구와 평론활동으로 문학의 현실반영적 측면을 강조하는 유명한 현대 문학가, 김우종 교수가 최초 창간한 역사적인 계간지입니다. 친일 잔재와 권력의 모순에 대항하는 자세로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지향하며 시인 윤동주의 삶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학적 업적을 빛낸 작가의 작품을 매해 선정하여 수상하고 있습니다.


이번 신인문학상 수상 중 김우종 평론가님께서는 저와 사전에 교감이 되어있었던 것도 아닌데 선정 경위에 대한 심사평으로 ‘인문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에게 소설은 외도가 되지만 방법만 다를 뿐 이것도 그가 하는 생명공학일 수 있다. 유전자 연구를 생명공학의 한 분야로 설정했다면 생명의 사랑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인문학적 사상체계가 함께 하고 그 기능을 문학이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햇수도 다르고 전공도 다른 삶을 살았지만 같은 생각에 공감하는 게 참으로 신기하였습니다. ‘철학 하는 과학’ 혹은 ‘과학 하는 철학’을 꿈꾸는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질(異質)의 경계에 사는 집단이 앞으로 더 풍성해져서 과학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교육자적 사명감으로 실천하는 귀감(龜鑑)이 되도록 더 노력하고 싶습니다.



Q. <유전자 군상의 뫼비우스> 소개 부탁드립니다.

인체의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놈을 해독해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는 게놈 프로젝트가 이미 30여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소설에선 머지않은 2030년에 이에 대응한 신약 개발이 이뤄지는 세계를 가상으로 설정해 이야기를 전개했습니다. 화자인 “나”는 유전체를 분석한 후, 질병의 원인이 되는 DNA의 배열을 바꾸거나 이를 교정하는 과정을 통해 신약을 개발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과학자입니다. “나”는 어느 날 남편에 의해 살해된 동료 과학자의 죽음을 마주합니다. 그 죽음의 원인을 찾다가 개발 중인 신약을 남편에게 테스트하려던 연구원이 이를 거부하는 남편에 의해 충동적으로 살해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어 “나”도 선배가 개발한 망각의 신약을 자신에게 테스트하고는 점차 말살되어갑니다. 이번 소설에서 연구자의 욕망, 인간의 욕망이 나아가 사회의 파멸을 부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문명은 또 다른 위험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소설은 시대의 첨단에서 우리 사회나 개인이 문명 간의 이행을 순조롭게 할 수 있도록 사유의 장을 제시합니다. 이 시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와 구원의 길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했습니다.


Q. 교수님께서는 이 소설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화자인 "나"는 저를 투영하고 있습니다. 마치 칼 융(Carl G. Jung)이 말하는 '페르소나(Persona)'의 '나르시스(Narcissus)적 페르소나'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유전자를 공유 받은 '딸'에 씻을 수 없는 낙인의 질병을 물려준 죄책감은 "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죠. 살해된 동료 연구원의 아들은 "나"의 '딸'과 나이가 비슷한 그러나 등치(等値)에서 다른 의미의 존재로 등장합니다. ‘녀석’은 낙인된 유전자를 받고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아이러니하게 욕망으로 가득한 "나"에게서 긍정으로 변화되고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죠. "나"와 "나"의 실체적 페르소나인 '딸'은 사라지지만 불씨는 절망 유전자의 낙인을 받은 '녀석'으로 이어져 희망으로 부활(復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절망이자 동시에 희망의 불씨인지라 개인적으로 참 애착가는 인물이에요. 더불어 제 소설은 항상 해피엔딩을 지향하려고 해요. ’모스크바의 신사’, ‘링컨 하이웨이’의 작가인 에이미 토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어려운 일상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Q. <유전자 군상의 뫼비우스>를 쓰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유전자'란 수십억 년 전부터 무한한 시간을 함께한 인간 생명의 근원입니다. 유전자를 감히 멋대로 교정하고 이상향을 실현하려는 인류의 꿈속에는 언제나 파멸의 칼날이 등 뒤에서 우리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습니다. 세차게 몰아치는 자비심 없는 과학의 생채기로 인해 한 꺼풀 한 꺼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한 무리의 유전자, 즉 유전자 군상(群像) 속에 인류의 성공과 파멸이 저울질되는 뫼비우스적 현실이 존재합니다. 이 험난한 시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와 구원의 길은 무엇일지 이번 소설에서 소중히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언제부터 작가의 꿈을 꾸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작가라는 직업을 알게 되고 멋있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호기심 많던 시절, 늘 굳게 닫혀있던, 저에게는 금단의 영역이었던 아버지 서재에 어느 날 몰래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늘 웅장한 경비병 모습처럼 서재 한 켠 책장을 늠름히 지키고 있던 세계문학전집을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부터 시작하여 도장 깨기를 하듯 재미있게 읽어나가다가 어느새 마지막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가슴 속에 무언가 벅차오르며 뿌듯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중 성균관대 김용훈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카뮈의 '이방인'은 제 가슴을 요동치게 만드는 명작 중의 명작이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알베르 카뮈는 지금의 아이돌에 버금가는 존재였습니다. 이후 과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그때의 감흥은 점점 잊혀 갔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유학 생활 중에 보게 된 문화적 충격은 다시금 그때의 감흥을 되새김질하게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과학자로서 하나의 길만을 집요하게 강요하는 한국 문화와 달리 외도를 적극적으로 허용해주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 천문과학자이면서도 문학 집필을 꾸준히 시행하시는 폴 맥퀸과 스티븐 스트로가츠 교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린, 칼 세이건,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등 수많은 유명 과학자가 문학 생활을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작품을 보고 생각을 공유하면서 스스로 펜을 들고 직접 써보고 싶다고, 닮고 싶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로 널리 알려진 루이스 토마스처럼 되고 싶은 꿈을 그때 갖게 되었습니다. 이후 귀국하여 과학자와 작가의 길을 병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있는 성균관대학교 화학공학과에는 같은 생각으로 그 가치를 장려하는 동료 교수님들이 참 많습니다. 행복하게 배우면서 조금씩 제 뜻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Q. 과학이 인류의 파멸을 이끄는 칼날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플라톤 시대에 과학과 철학은 하나였습니다. 14세기까지도 구분 없이 현재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고 알려져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조금씩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세기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칸트는 철학과 과학의 분리를 경계하며 철학을 엄밀한 과학의 기반 위에 놓으려고 많은 애를 썼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 실증주의 영향이 거세지면서 철학에서 과학은 자연히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철학을 잊은 과학'의 시대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위선적으로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헤겔의 '정반합의 변증법'을 과학 속에서 즐겨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인지하고 인류 번영을 위해서 하나였던 둘을 합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하드코어 과학에 빠져있는 실용주의 공학자들은 세상을 이롭게 하고 번영 시키기 위해서라도 여러 번 이 뜻을 되새기고 기억해야 합니다. 인문학적 소양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제 경험처럼 소설은 과학자가 실천하기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소설을 읽고 쓰면서 '철학적 과학'의 시대를 복원하고 대중화하는 데 노력해야 합니다. 단순 '공학 기술자'가 아닌 '자연철학을 하는 고귀한 과학자 혹은 공학자'로 대접받을 유일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는 제가 소설에 관심을 두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즘 학생들은 그들의 미래에 뻔한 결말이 있는 한 길의 직업 교육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따라올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의 대안을 당당히 제안해주기 위해서 하루빨리 철학과의 조우를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성균관대 학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번 수상에 대해서 학생들과 동료 교수들께서 많은 격려를 주고 계십니다. 이번 지면을 통해서 다시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해요. 제 수업을 수강했던 학생들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공학자로서 외통수의 한길만 바라보지 말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서 다양한 길을 창조하라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전에 참여하고 있는 제가 출판한 '제4의 언어: 내부의 속삭임'과 '인투 더 쿨: 에너지 흐름, 열역학 그리고 생명'을 꼭 읽어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저와 같은 길을 함께하는 학우들이 많아 지길 바래요.


<유전자 군상의 뫼비우스>는 창작산맥 제43호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