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사랑할 자유’,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 527호
  • 기사입력 2023.11.14
  • 취재 송유진 기자
  • 편집 김희수 기자
  • 조회수 1031

| ‘삶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얼마 전 밤에 일종의 호소문을 썼습니다. 삶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말입니다.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그 글을 쓰면서 이제는 핵전쟁을 피할 기회가 거의 없다고 느꼈습니다. 문득 사람들이 전쟁의 위험에 이렇듯 수동적인 이유는 대다수가 삶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과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화 사랑이나 전쟁 공포를 외치기보다 삶에 대한 사랑을 호소하는 편이 더 효과가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대전 발발 위험이 절정으로 치달았던 1962년 9월 29일, 에리히 프롬이 영국 출판업자 클라라 어커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그는 핵전쟁의 위험을 뻔히 알면서도 많은 사람이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삶에 대한 무관심과, 파괴적인 것에 끌리는 무의식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와 반대되는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랑의 핵심’인 ‘삶에 대한 사랑’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공허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심리와 그들에게 필요한 ‘살아있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고자 한다면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추천한다.  


저자 에리히 프롬은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사회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사회학을 전공해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졸업 후에는 베를린 정신분석 연구소 등을 거치며 정신분석학을 공부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일하며 사회 심리학을 연구하던 그는 나치가 집권하자 미국으로 망명해 정신분석에 관한 연구와 교육을 이어갔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랑의 기술』을 비롯해 『소유냐 존재냐』, 『자유로부터의 도피』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사랑의 기술에서 이야기하는 관계의 사랑보다 더 근본적이고, 모든 사랑의 핵심인 ‘삶에 대한 사랑’을 에리히 프롬에게 들어보자.


| 사랑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실감하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활동적일 수 있는 자기 나름의 힘과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1950년대부터 삶을 사랑하며, 살아 있다고 느끼는 능력이 점차 줄고 있다고 보았다. 당시에는 시장 경제의 탄생과 대량생산으로 제품 판매 전략이 중요해진 시점이었고, 마케팅에 지배된 사람들은 자신의 인성마저도 상품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개인적 특성이 있는지, 삶을 사랑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있는 것처럼 연출할 수 있는지’에 집중한 것이다. 사람들은 온갖 자극으로 자신에게 활력과 생기를 억지로 불어넣으며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내적 활동성’을 잃어버렸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기감정을 느끼기보다 체험과 감정 서비스에 공감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자기감정은 불확실하고 심지어 부정적일 때도 많다’는 현대사회의 달콤한 속삭임이 상황을 더 악화했다. 하지만 자극으로 일깨운 연출된 감정에만 공감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서적 능력을 잃고 만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는 삶에 관해 이야기하며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차이를 설명한다.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폭력 수단의 크기를 자기 인성의 크기로 착각한다. 자신의 정신, 사랑, 생명력을 키우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으며, 수단의 힘을 키우는 데 모든 에너지를 투자한다. 그러면 폭력 수단의 잠재력은 향상될지 몰라도 더욱 약해진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와 반대다. 사랑하는 사람은 더 많이 느끼고 세상을 관찰하며 더 생산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 자신과 가까워진다. 폭력과 달리 사랑은 ‘내적 노력’, 무엇보다 용기를 전제로 한다. 에리히 프롬은 삶은 본질적으로 성장의 과정이며 온전해지는 과정이므로, 통제와 폭력의 수단으로는 사랑할 수 없으며, 삶에 대한 사랑은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사랑의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산업 생산 분야에서 결과를 내는 것은 기계와 장치다. 그 때문에 우리는 자신마저 기계로 생각해 빠른 결과를 얻고 싶어 하고 원하는 효과를 성취할 수 있는 장치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삶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가 삶을 사랑한다면 삶의 과정이, 다시 말해 변하고 성장하며 발전하고, 더 자각하며 깨어나는 과정이 그 어떤 기계적 실행이나 성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 현대인의 자기기만: 활동성과 수동성

우리가 이해하는 ‘활동성’과 ‘수동성’이라는 두 개념은 20세기가 흐르는 동안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스피노자 등은 ‘활동성’을 우리 안에 깃든 정신력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표현이라 여겼다. 여기서 활동성은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고, 강요된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에게 깃든 창조적 힘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탄생한다는 의미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 이 개념에 ‘강제적 동기’가 포함되었다. 에리히 프롬은 내적 강제의 대표적인 예인 ‘불안’에 대해서 설명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심한 공포와 불안이 담겨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이다. 사람들은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단 한 순간도 고요하게 살지 않는다. 중세에는 인간의 구원과 완성이 목표였으나, 산업 시대에는 물건의 최대 생산과 최대 소비가 목표다. 현대의 산업 시대 분위기와 꼭 들어맞는 분주한 ‘활동성’의 모습을 띤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기가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운지, 자기 일이 얼마나 단조로운지 의식하면 자기 상황을 모두 바꿔야 하는 복잡함과 어려움을 피하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즐겁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일, 즉 강제 노동의 고통을 인식하지 않고 일을 더 많이 해서 무감각해지려 한다. 다시 말해 현대인의 활동성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지지하고 조종한 결과이다. 이러한 수동성으로 인해 인간은 공허한 내면으로 날이 갈수록 더 많은 것을 불어넣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수동성이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진정한 활동성’의 연습을 위해 가만히 앉아 명상하려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무기력의 이유와 삶에 대한 사랑에서 샘솟는 ‘진정한 활동성’을 찾고 싶은 당신에게 이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비법은 없지만 많이 배울 수는 있다. 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계속 밖으로만 나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사람, 생명과 사물의 차이를, 행복과 흥분의 차이를, 수단과 목적의 차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을 향해 이미 첫걸음을 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