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리다’ -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532호
  • 기사입력 2024.01.22
  • 취재 이준표 기자
  • 편집 오소현 기자
  • 조회수 947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다른 사람들과 상호작용하고, 자신만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가며 고유한 개인으로 성장하여 더 밀도 높은 인간이 된다.”


잘된 삶과 잘못된 삶을 가르는 기준이 있을까? 타인의 단점을 보고 은연중에 위안 삼고 있지는 않은가. 이 책은 나와 당신, 그리고 모두의 이야기다. 삶을 그대로 들여다볼 용기가 없던 순간을 마주한 적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소개한다. 


작가 김원영은 서울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동시에 1급 지체장애인으로 골형성부전증을 앓고 있어 휠체어를 타며 생활한다. 완전히 다른 시선을 받는 두 지위를 가진 저자는 때로 자신의 존재가 무가치하고 열등한 것이 아닌지, 끊임없이 되묻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장애, 질병, 가난, 볼품없는 외모, 부족한 재능, 다른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세상의 법정에서 실격을 선고당한 이들에 대한 변론을 진행한다. ‘품격과 퍼포먼스’, 잘못된 삶’, 그리고 ‘초상화를 그리는 일’과 함께 작가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 품격을 위한 퍼포먼스 vs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


품격이란 주변 형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를 갖춘 물건이나 사람의 모양새를 뜻한다. 주로 특정 사물이나 인물의 가치를 높여주는 용어로 사용된다. ‘당신의 품격을 높여주는 슈트’, ‘품격 있는 자동차’ 등으로 말이다. 품격이란 주변 형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자신의 지위, 역할, 신분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가치이다.


반면 ‘존엄’은 품격과 차이가 있다. 헌법 제10조에서는 지위나 역할, 신분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권리의 기본 전제이자 핵심 원리로 존엄성을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존엄은 칸트가 말한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만 삼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는 의미에서의 ‘목적’과 일맥상통한다. 타인을 수단과 함께 목적으로 대우할 때, 서로를 존엄하게 여기며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 즉 품격에는 고저가 있을 수 있지만 존엄에는 낮은 존엄, 최고 존엄이 없는 이유이다.


품격을 유지하면 사회에서 좋은 대우, 권위, 권력, 존경 등을 얻기 수월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품격을 놓지 않고 ‘품격 주의자’로서의 삶을 이행하고 강요받는다. 때로는 그 품격을 상대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고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지 못한 사람들, 신체적 장애나 질병 등을 이유로 사회에서 배척당한 사람들은 품격 있는 삶을 달성하기란 어렵다. 가령 NASA에서 근무했던 흑인 여성 수학자는 흑인 전용 화장실에 가기 위해 매일 800m를 달려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권리조차 침해될 때 품격을 가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사회적 편견과 차별, 열악한 사회, 교육, 경제적 여건 등으로 인하여 개인의 성찰만으로 품격을 지키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변에 존재한다.


품격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허둥대지 않고 ‘문명화된 몸가짐’을 통해 예의범절을 지키며 노련하게 삶을 꾸려 나간다. 통제력과 성찰성을 바탕으로 질서와 규범을 지키는 데에 탁월하다. 이들에게 품격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들과 나를 은연중에 구분 짓고 품격을 위한 행동, 즉 퍼포먼스를 강요한다.


"나는 그저 ‘전시’되었다. 그들의 모임에서 나는 일종의 간판이었다. 그들이 모임을 유지하면서 가꿔온 화초 같은 존재였다. (중략) 나의 존재는 하나의 위안이요, 뿌듯함이요, 그들의 삶을 정화시켜 주는 화초였을 뿐이다"


품격을 위한 퍼포먼스에서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실재를 공유할 필요가 없고, 서로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상호작용이 필요하지도 않다. 품격 있는 권력자의 고매한 태도를 연출할 때, 의전을 수행하는 실무자는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는 장애인, 노숙인, 빈자들이 권력자의 도덕적 선량함을 빛내는 데 동원되지만, 이들은 무대에서 익명화되고 기호화된다.


“능청스럽고, 지적이고,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는 정신적 매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압박, 사무실의 생수통을 갈지 못하는 대신 인사성 바르고 동료들의 생일이라도 잘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일이다.” 


품격 강요에 대한 부정 中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에서 활용하는 퍼포먼스가 전부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저자는 품격을 위한 퍼포먼스 대신 ‘존엄을 위한 퍼포먼스’를 우리가 실천할 수 있다고 전한다. 둘 다 퍼포먼스의 형태를 띠지만 명백한 차이가 있다. 품격을 위한 퍼포먼스가 나의 가치를 위해 타인을 수단시하고 그림자로 만든다면, 존엄을 위한 퍼포먼스는 상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관계를 구성하고 실천하는 데에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친구 앞에서 육아가 화제로 나왔을 때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로 돌리는 친구’,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자폐 아동에게 무관심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눈길을 돌리는 대학생’ 등 이들은 모두 서로의 연기가 품고 있는 의도를 함께 공유한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이러한 존엄을 위한 퍼포먼스는 타인과 나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시키며 밀도 있게 만들어준다.”



▣ 잘못된 삶


“당신의 실수로 내가 태어났으니 그 손해를 배상하시오”


잘못된 삶 소송은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산부인과 의사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이다. 쟁점은 어떤 삶이 잘못됐고, 어떤 삶이 좋은 삶인지 판단할 수 있는가에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과연 더 행복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태어나는 것보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감히 손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는 청각장애를 지닌 이들을 예로 들며 반론을 진행한다. 청각장애인이 공유하는 수화언어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언어 체계이다. 하나의 고유문화를 형성하며 어떤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대화보다 장점을 가질 수 있다. 주류 사회의 문화를 향유하지 못한다고 하여 이것이 잘못됐거나, 열등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특정 장애나 결핍을 안고 태어났다고 해서 잘못된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저자는 사회에서 매력적인 요소가 아닌 장애, 볼품없는 용모, 작은 키, 질병 등이 부담하는 현실적 조건을 부정하지 않는다. 지체 장애를 안고 태어난 이들은 일반인이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온전히 체험하기 힘들 때도 있다. 뛰어난 용모를 갖춘 자는 연애, 우정, 직장 사회, 등 여러 영역에서 유리한 것 또한 사실이다. 사회에서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상대의 호의와 법적 권리에 의해 일정 수준의 삶은 보장받겠지만 사적인 친밀 모임, 성적인 결합,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에 진입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질 기회를 공평하게 분배하기란 불가능하며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장애인차별금지법상의 권리나 시민들의 교양 인권 의식, 도덕적 배려 따위에 기대지 않고도, 그 어떤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람들 사이에서 존중받고, 호감의 대상이 되고,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그럼에도 저자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고유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려는 실천적 시도가 헛되지 않다고 밝힌다. 그러한 시도야말로 이 사회에서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저자는 ‘초상화’로서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작업을 소개한다.



▣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


숨 가쁘게 움직이는 현대사회에서 사람을 만나 관계를 이어 나가는 일은 여간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린 소중한 사람들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삶을 이어나간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주고받을 때 겉모습을 보는 것을 회피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바깥만을 보고 사람을 판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대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고개 숙여 말을 거는 순간, 그의 이야기로 들어간다. 상대방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너와 나, 서로의 초상화에 한 점이 찍힌다. 그 점은 선으로, 그리고 면으로 천천히 확장된다. 각자의 색을 통해 본인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이 과정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정체성이란 객관적인 대상처럼 존재하는 어떤 산물이 아니다. 정체성은 우리가 각자의 인간적 상황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수행적 가치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어떤 경험과 도전에 맞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역사가 체화된 인간적 속성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 누구도 나의 정체성에 대해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


“타인의 삶을 잘못되었다고 규정하고, 그로부터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야말로 어쩌면 이런 ‘정신 승리’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서사에 위계가 있을까”, “당신의 고유함은 정당하고 정당하다”, “괴물이 될 필요는 없다” 등 나머지 이야기를 책에서 확인해 보자. 기사에 다 담지 못한 작가의 고뇌와 깊은 사유의 흔적들을 품고 있다.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데에 실패와 좌절을 겪는 이들에게, 사회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상처받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모두 이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너(나)를 만나서 참 잘된 것 같아’라고 말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최종 변론을 종결한다.”



사진 출처


https://www.peoplepower21.org/magazine/177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