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 485호
  • 기사입력 2022.02.14
  • 취재 박창준 기자
  • 편집 김윤하 기자
  • 조회수 1752

<일상의 지루함에 지친 당신에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쳤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따분한 일상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훌쩍 날아가고 싶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분단위로 계획된 여행도 즐거울 수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행 또한 우리의 새로운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은 후자의 방법으로 인생이라는 여행을 즐기는 한 노인의 이야기다. 노인의 인생에는 큰 욕심과 치밀한 계획 따위는 없다. 그저 산다는 것 그 자체를 삶으로 받아들이고 때마다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긴다.


“인생이 연장전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따금 변덕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지.”


100세 노인의 이름은 알란이다. 100살 축하파티가 예정된 어느 날, 큰 고민 없이 양로원의 창문을 넘어 도망친 알란은 무작정 길을 나선다. 양로원을 떠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한 알란은 그곳에서 한 청년이 맡긴 트렁크를 엉겁결에 훔쳐 버스에 탄다. 알란은 트렁크의 내용물에 별생각이 없었지만 사실 그가 훔친 트렁크는 수십억이 담긴 한 갱단의 돈가방이었다. 노인의 실종에 알란을 향한 경찰과 갱단의 의도치 않은 추격전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율리우스, 베니, 구닐라 등 여러 사람들이 그의 여정에 함께한다. 어쩌다 뭉치게 된 그들은 과연 그들을 쫓는 무리로부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창문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스틸컷



“알란은 자기가 사는 세상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는 알고 싶었지만, 거기에 끼어든다거나 어떤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 소설의 묘미는 알란의 유쾌한 모험만이 아니다. 책은 알란의 전 생애를 조명한다. 1905년생 알란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열살에 폭약회사에 취직하여 폭탄 제조를 특기로 가지게 된다. 특별한 특기 때문일까, 그저 자신이 잘하는 일에 몰두하던 알란은 의도치 않게 세계사 곳곳에 그의 발자취를 남긴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장군의 목숨을 구하는가 하면, 해리 트루먼과 친구가 되어 미국 핵폭탄 제조의 결정적인 단서를 던지고, 마오쩌둥의 아내를 구하고, 스탈린과 김일성을 만나기도 한다. 세계사의 주요 인물을 수도 없이 만난 알란이지만 그는 정치적 중립성을 가졌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 갈등 속 정치적 견해 없이 냉전 상황을 살아온 알란을 보고 있자면 심각한 전쟁과 갈등이 우스운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작가는 삶을 그 자체로 즐기며 정치와 종교에 매달리지 않는 알란을 통해 세계사의 비극과 이념 갈등을 풍자한다. 




“알란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 반대로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 터, 쓸데없이 미리부터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양로원 창문을 넘어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이는 100세 노인의 모험은 상상만으로 즐겁다. 전체적으로 재치 있고 유쾌하게 그려진 작품이지만, 막상 알란이 살아온 인생과 그 배경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큰 그늘이 드리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혼란의 시기를 살아온 알란은 부모를 잃은 뒤 가난함에 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으며 정신병원에 입원당하고, 수용소에 끌려가고, 항상 쫓기는 등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알란은 굴하지 않는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몸을 맡긴다. 설령 자신이 아픈 무릎을 가진 100세 노인이 되었을지라도 말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선사한 힐링, 편안함, 순수한 재미 또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알란의 이러한 특성으로부터 기인했을 것이다. 독자들은 그저 걱정 없는 알란의 세계를 마음껏 즐기며 그 속에서 책의 유쾌한 기운을 얻어갈 수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알란처럼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 이따금 시원한 모험과 도전을 상상하지만, ‘현실에선 힘들지’하고 중얼거리곤 다시 일상에 머무를 뿐이다. 이는 100세 노인의 반의반 정도만 살아도 각자의 달팽이 집 속으로 숨어버리는 우리가 속 시원한 모험이야기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알란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정답이라 볼 수는 없다. 살아가는 방식에 하나의 답은 없는 법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는 평소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색다른 방법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100세 노인이 딱딱한 양로원 침대가 아닌 눈부신 발리 해변의 긴 의자에 몸을 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매일을 같은 방식으로만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하루가 지겨워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한권의 책과 함께 알란의 철학을 배워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