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저

  • 493호
  • 기사입력 2022.06.20
  • 취재 박창준 기자
  • 편집 김윤하 기자
  • 조회수 1838

일상 속 다른 시선을 읽고 싶은 당신이라면

살아가며 지나치는 모든 대상들에 관심을 가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은 사려 깊은 사람들이 쓴 책을 통해 그들의 통찰을 얻곤 한다. 통찰이란, 자신의 주변 환경을 새로이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 속 통찰을 에세이 류의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로 꼽기도 한다.

정치외교학부 교수인 김영민 저자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이와 같은 삶에 대한 소소한 통찰을 담고 있다. 이 한권의 책에서는 영화, 사회, 대화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은 글과 칼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책 내에서 주목할 만한 저자의 생각을 소개하려 한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아침은 하루를 여는 시작의 시간이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다. 그렇다면 왜 시작의 시간에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인가? 부고는 늘 죽음보다 늦게 온다. 우리가 보고 있는 밤하늘의 별도 이미 죽어 있을 수 있다. 그저 죽기 전의 빛이 우리의 눈에 도달하는 중일 뿐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출산율이 바닥을 치고, 낙태율은 치솟는다. 이에 몇 백년 뒤 한국은 소멸할 것이라는 전망도 존재한다. 그리고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인생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사회적 죽음이 찾아온다. 이후 신체의 수명이 다해갈 때 육체적 죽음이 찾아온다.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시기에 찾아오는 아침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좋으며 그 이유는 다섯가지다. 첫째, 이미 죽어 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다.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매년 가을이면 추석이 찾아온다. 추석은 기쁨의 명절이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추석은 불편한 시간이기도 하다. 대학 새내기라면 ‘대학은 잘 갔는지’, 취업 준비생이라면 ‘요새는 무슨 일 하는지’, 나이가 있다면 ‘결혼은 언제 할 것인지’, 온갖 질문에 불편해지곤 한다.

저자는 먼저 자신의 친구를 예로 들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이야기한다. 친구의 오래되고 극도로 느끼한 연애편지를 발견하고 그는 과학자의 탈을 쓴 친구에게 그런 느끼한 면모가 있음에 놀란다. 이후 저자는 친구를 만나 왜 그런 느끼한 표현을 썼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평소 감정 기복이 없던 친구는 고성을 지르며 저자에게 난동을 부린다. “그 편지를 쓰던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나더러 왜 그랬냐고 묻지 마!” 저자는 이러한 친구의 행동을 자신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과거를 부정하기 위해 기존의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파괴하려 드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제 다시 추석으로 돌아가자. 그는 위의 사례와 함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불편한 추석을 타개할 방법으로 제시한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김영민(2018),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어떤 자유와 존엄을 선택할 것인가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인간은 모두 우연의 결과물이었다. 즉, 삶의 시작은 선택할 수 없으며, 그때의 우리는 자유와 존엄이 주어진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태어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은 자신의 환경과 능력 등을 이용하여 자신만의 온전한 삶을 살아가고 죽는다. 따라서 어떤 자유와 존엄을 선택할 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 한 예로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치료의 중단 결정권에 관련한 법으로, 원한다면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환자는 자신의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연명치료 중단의 여부는 의사의 판단이 필수적이기에 한 사람의 죽음을 좌지우지해야 하는 의사의 부담이 크다. 존엄사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보라매 병원 사건과 김 할머니 사건에 대해 알아본다면 연명의료결정법을 더욱 깊이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사안은 의사의 자유와 존엄에 관련하여서도 생각해야 할 지점들이 있다. 환자와 의사. 우리 사회는 두 종류의 그것들 중 어떤 자유와 존엄을 선택해야 하는가? 개인은 어떤 자유와 존엄을 통해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