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국정농단[東廠]과 명(明)의 멸망

  • 531호
  • 기사입력 2024.01.10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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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중국 역사를 통관하면 하나의 제국이 멸망하게 된 원인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다. 성군의 상징인 요순(堯舜)과 대비되는 폭군의 상징인 하나라 걸(桀)과 은나라 주(紂)의 극악무도한 폭정과 더불어 제왕의 무능함은 망국의 지름길로 가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 속한다. 이런 정황에서 제왕의 무능함은 환관이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그 결과 망국의 길로 갔던 것에 주목하자.


환관 조고(趙高)의 농간으로 망한 진나라, 후한 시대의 십상시(十常侍)의 매관매직은 명대 이전 환관이 국정을 농단한 대표적인 예다. 후한 이후 중국역사에서 환관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제한적이었지만 모든 권력이 집중된 황제에게는 여전히 환관처럼 수족같이 부릴 개인적인 노예가 필요했고, 이에 황제가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지 못할 때에는 손발이나 다름없던 환관들이 국정을 농단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었다. 실제 명대에 이르면 환관이 이른바 ‘황제 비밀경찰 조직[皇家特務機構:東廠]’의 핵심 구성원이 되고, 그들이 국정을 농단한 결과 명을 망국의 길로 나아가게 한 역사가 펼쳐진다.




▲ 명대 사대 특무기구[錦衣衛, 東廠, 西廠, 內行廠]에서 錦衣衛와 東廠 둘 중 어떤 기관의 권력이 더 막강했는가를 묻는 畵譜.
▲ 황가특무기구(皇家特務機構)인 동창과 서창에 관한 책


2. 환관의 나라 명나라


“명나라는 환관의 나라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명나라는 환관이 국정을 농단한 대표적인 시대다. 조선의 문신 홍익한(洪翼漢, 1586~1637)은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하의 권세를 가진 자는 첫째는 환관인 태감(太監) 위충현(魏忠賢)이요, 둘째는 객내저(客奶姐)요, 셋째가 황상이다.”라는 말인데, 그 전후 사정은 다음과 같다.


한 패자(牌子)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일을 조금 아는 자였다. 시사에 대하여 말이 미치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감 위진충(魏晉忠)이란 자는 태창황제(泰昌皇帝:光宗)가 동궁에 있을 때에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되어 지금 천자[朱由校: 熹宗 天啓帝]에게 총애를 얻었는데, 지금 천자가 즉위한 처음에 이름을 ‘충현’이라 하사하고 더욱 총애하였다. 이로부터 중간에서 권병(權柄)을 농락하여 위세가 날로 성하매, 드디어 황상의 보모(保姆) 객씨(客氏)와 서로 체결하여 안팎으로 선동하고 화복이 모두 그 손아귀에서 나오니, 온 나라 사람들이 눈을 흘기며 말하기를, “천하의 권세를 가진 자는 첫째는 태감 위충현이요, 둘째는 객내저요, 셋째가 황상이다.” 하였다.[洪翼漢, 『朝天航海錄』]


문맹(文盲)으로 알려진 천계제는 환관인 위충현에게 국사를 맡기고 황제의 업무보다는 목수질하고 귀뚜라미 싸움을 즐겼으니 당시 나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염연히 황제가 있는데 환관인 위충현이 국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조선조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3. 영락제(永樂帝)의 황가특무기구[東廠]


영락제[朱棣: 成祖]는 명나라 학문을 종합한 『영락대전(永樂大典)』, 『사서대전』, 『오경대전』을 편찬하고 호광(胡廣) 등에게 『성리대전(性理大全)』(1415년)을 편찬하게 하고 영토를 넓힌 결과 중국역사에서 뛰어난 황제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조에서는 1419년(세종 1)에 『성리대전』을 수입하여 이후 조선이 주자학의 나라가 되는 시발점을 알린다.


문제는 영락제가 이른바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조카인 건문제(朱允炆 : 惠宗 建文帝)를 폐위하여 황제가 된 것이다. 조선조에서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과 유사한 사건이다. 영락제는 적장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항상 정통성에 논란이 있었다. 주원장은 유가의 대의 명분에 입각하여 황위는 적장자가 계승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에 올곧은 유학자들은 주체의 정통성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이런 정황에서 영락제는 건문제의 측근이자 당대의 대문장가인 방효유(方孝孺)에게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라는 글을 쓰라고 요구했는데 그가 오히려 비난하는 글을 쓰자 그 유명한 ‘십족[구족+제자]’을 멸하는 사건을 벌인다. 이처럼 양심적인 학자들은 영락제에게 협조를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협조하는 사람이라도 의심을 하였던 영락제는 황제가 신임할 수 있는 환관들을 중심으로 정치적 반대 세력 및 지식인들을 억누르기 위하여 “동집사창(東緝事廠)”, 즉 동창(東廠)이라는 새로운 황가특무기구[1420년]를 만든다.


동창의 주요 목적은 문무 관료와 황족, 군인들을 감시하면서 꼬투리만 잡히면 족치는 것이었는데, 병신으로 살아 돌아와도 다행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악랄한 고문으로 유명하였다. 동창은 명대 감찰기관인 서창(西廠) 및 금의위(錦衣衛) 등과 더불어 권력을 행사하였지만 자체 감옥을 만들어 범인 심문의 권한까지 가졌기에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반신불수 혹은 죽음으로 끝나는 고문을 행한 것으로 악명높았다. 오늘날 검찰에서 행하는 흔히 먼지털이식 수사는 동창이 행한 악랄함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였다.


명나라 황제들이 특수한 임무를 지닌 조직을 통해 나라를 다스렸다는 점을 ‘특무치국(特務治國)’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동창의 우두머리[秉筆太監] 가운데 유명한 인물이 바로 천계제 때의 환관 위충현이었다.


▲ 중국 영화감독 서극(西克)의 ‘소오강호(笑傲江湖)’ 중 동창의 환관인 고금복으로 분장한 배우 유순(劉洵)의 모습인데, 

무협 영화 속 동창 환관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4. 환관 위충현의 국정농단과 망국 조짐


위충현에 관한 자료는 홍익한의 『조천항해록(朝天航海錄)』에도 잘 나와 있다. 원래 시정잡배였는데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자 스스로 거세해 환관이 됐던 위충현은 천계제의 신임을 얻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 그 정점은 동창의 수장(首長)인 병필태감(秉筆太監)이 된 것이다. 병필태감은 ‘황제의 붓을 관리하는 환관’이라는 의미인데, 각지에서 상소문이 올라왔을 때 황제가 빨간색으로 자신의 의견을 적는 ‘주비(朱批)’를 1623년에 위충현이 대신하게 된다.


이에 위충현은 고헌성(顧憲成)을 중심으로 청의(淸議)를 대변하던 동림당(東林黨) 관료들을 탄압하고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휘두르는 전횡을 일삼는다. 나중에 권력의 정점에 오른 시점에 위충현은 궁중에서 말을 타면서 황제 앞에서도 하마하거나 배례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요순 임금에 견준다는 의미로 ‘요천순덕지성지신(堯天舜徳至聖至神)’이라는 존호를 사용하고 자기를 모시는 생사당(生祠堂)을 세워놓고 참배하지 않으면 죽였다고 한다. 위충현의 이런 전횡은 결과적으로 명의 멸망을 촉진한다.


명나라 조정의 내각, 육부에서부터 전국의 총독, 순무에 이르기까지 위충현 일당의 세력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홍익한이 본 위충현이 행한 일 두가지를 보자.


위충현이 이에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를 미워하여 문득 배척하고 축출하니...이들은 당시의 명류들이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洪翼漢, 『朝天航海錄』]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 진우정(陳于廷)...등의 관직을 삭탈하고 서인으로 삼아 그날로 백의 차림에 관을 벗기고 성 밖으로 쫓아내니, 도성 사람들이 팔뚝을 부둥켜 쥐고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 세 사람은 위충현이 국권을 농단하는 것을 극력 논박하여 이렇게 된 것이다. 그들이 아뢴 상소는 양련(楊漣)이 지은 것으로서, 글자마다 간담을 에는 혈성(血誠)이 어렸으니, 참으로 나라를 구제하는 약석(藥石)이었다.[洪翼漢, 『朝天航海錄』]


위충현에게 빌붙지 않는 인물이나 애국충정의 심정에서 나라를 구제하는 약석 같은 말을 한 인물들은 모두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런 점과 관련해 위충현은 자신의 당파인 엄당[閹黨: 명나라 때 환관들의 정치 집단을 이르던 말]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자.


엄당이 한 사람을 대신으로 올리고 재목으로 만드는 데는 몇 년도 부족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파멸시키는 데는 하루면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얼마나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들이 국정을 제멋대로 농단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이런 정황에서 당시 천계제가 어떤 짓을 했는지에 대해 홍익한의 말을 통해 보자.


황제가 귀에 거슬림을 싫어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비방하는 요언(妖言)이라 하여 형벌하고 배척하였으니, 소인에게 정사를 맡겨 간사한 꾀를 자행(恣行)하여 바른말 하는 자를 쫓아 버리고서 나라가 나라꼴이 된 적은 있지 않았다.[洪翼漢, 『朝天航海錄』]


황제가 무능하면 국가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운용되지 못하고 환관이 판치게 되며, 당연히 신하들의 국가를 위한 충정어린 올바른 말이 제대로 실행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부정적인 정황이 한 황제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나라가 망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의종[毅宗: 崇禎帝]은 엄당과 위충현 세력들을 모두 정리하고 명신으로 유명한 서광계(徐光啟)를 재등용하는 등 국정 개혁에 임한다. 하지만 위충현이 죽은 지 불과 17년 만에 청나라의 침공과 이자성의 난을 끝으로 명나라는 멸망하고, 숭정제는 자금성 북쪽에 있는 경산(京山)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 위충현 초상화



5. 나오는 말


『명사(明史)』에서는 왜 명나라가 망했는지를 역사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라는 세종[嘉靖帝] 이후부터 기강이 날이 갈수록 쇠퇴했고 신종[萬曆帝] 말년에는 심하게 무너졌도다. 비록 엄격하고 공정하며 영특하고 용감한 군주가 있었음에도, 이미 다시 기세를 떨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거듭 희종[天啓帝]의 범속함과 나약함으로 인해, 환관이 권력을 훔쳐 상을 남발하고 혹형을 단행하여 충량한 이들이 참화를 입고 백성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비록 망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찌 대업을 이루겠는가?[『明史』 「本紀第二十二 「熹宗」]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냈기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종[萬曆帝]도 천계제보다 더 무능한 군주로 평가받는 인물인데, 명대 제왕들의 무능함에 의한 환관의 국정 농단은 결과적으로 망국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제왕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금의위(錦衣衛), 서창(西廠)은 물론 특히 동창이란 비밀 특무기구를 세워 환관들로 하여금 지식인을 감찰하고 체포하고 탄압하면서 건전한 국가발전을 막아버린, 제왕의 무능함을 이런 점을 더욱 부추긴 이같은 명대 정황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