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자 마음속의 ‘CCTV’ : ‘신독(愼獨)’

  • 535호
  • 기사입력 2024.03.13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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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전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유학자 마음속의 CCTV : 신독(愼獨)’이란 타이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시어를 보자.


愼獨工夫愼莫隳 : ‘신독’ 공부를 삼가 게을리하지 말라.

自家心實自家知 : 자신의 마음은 진실로 ‘자기 자신’이 알기에.

[鄭宗魯. 『立齋集』 「次月麓書堂韻」]


우선 “유학자의 위대한 점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해보자.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지향하는 삶,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실천하는 삶, 충서(忠恕)를 통해 인(仁)을 실현하고자 하는 삶 등 다양한 답을 할 수 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신독[홀로 있는 데서 삼가는 것]’ 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마음속에 품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한 삶을 들고 싶다. 


[사진 위 : 개인의 라이프사이클에 따른 CCTV 노출 실태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 평균 83회라고 한다.

사진 아래 :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 등장하는 가공의 국가 오세아니아의 권력집단인 당의 지도자이자 최고권력자.]


2. 『대학』 6장 : ‘무자기(毋自欺)’와 신독


내가 신독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남이 보지 않은 상태에서의 ‘홀로 있을 때의 상태 여부’는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의 눈에 의해 평가된다. 따라서 남이 보든 말든 항상 자신을 단속하면서 ‘자신의 뜻을 먼저 성실하게 하는 것[誠意]’은 ‘아주 특별한 인간[『대학』에서는 군자라고 하지만 성인(聖人)급 인간이 아닌가 한다.]’ 아니면 실천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 『대학』 6장[이른바 誠意章]의 언급은 이런 점과 관련된 것이다.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毋自欺]’이다.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싫어하는 것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를 마치 예쁜 여자를 좋아하듯 하는 것을 ‘스스로 만족함’이라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는 데서 삼간다’.


‘뜻을 성실히 한다[誠意]’는 것은 일단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것[毋自欺]’과 관련이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성적으로 악취를 싫어하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 상태는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저절로 드러나게 되는 스스로 속일 수 없는 마음에 해당한다. 따라서 신독의 상태가 문제가 되고, 이에 군자라면 신독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인은 어떤가?


소인이 한가로이 거할 때 불선한 짓을 하되 이르지 못하는 바가 없다가, 군자를 본 뒤 겸연쩍게 그 불선함을 가리고 선함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더라도) 남들이 자기를 보기를 자신의 마음속[폐와 간]을 보듯이 할 것이니, 그렇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이것을 일러 ‘마음이 성실하면 (그 성실한 기운은) 외면[몸]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 있을 데서 삼간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열 눈[모든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모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 엄하구나”라고 하였다.


군자와 소인의 갈림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독’의 실천 여부에 달려 있다. 소인의 마음속의 악함과 관련된 모든 부정적인 행위는 자신이 숨기고자 해도 결과적으로는 마치 ‘X레이 찍듯이’ 타인들의 시선을 통해 다 들어나게 되니 자신의 잘못을 숨겨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증자는 “열 눈[모든 눈]이 보는 바이며 열 손[모든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그 엄하구나”라는 표현을 통해 ‘타인의 시선에 의한 평가’와 관련된 신독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발언은 마치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 텔레비전[약칭: CCTV(Closed Circuit Television)]’이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 녹화하면서 우리들이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가를 감시하는 시스템을 연상시킨다.

추사 김정희는 『대학』 6장 ‘성의’에 입각한 신독 사유를 예술창작과 연계하여 이해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그림[不欺心蘭圖]>의 화제에서 예술창작과 관련된 신독을 보자.


“난을 칠 때에도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라도 마음속으로 반성하여 부끄러움이 없게 된 뒤에 남에게 보여야 한다. (증자가 말한 바와 같이)‘모든 사람의 눈이 주시하고 모든 사람의 손이 다 지적하고 있으니 이 또한 두렵지 아니한가’? 난을 치는 것이 작은 재주지만 반드시 ‘생각을 성실하게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正心]’에서부터 출발해야만 비로소 손을 댈 수 있는 기본을 알게 될 것이다.[도판 참조.]


작가가 ‘창작한 난’은 단순한 난이 아니다. 작가 자신의 내면적 삶의 성숙도, 정신세계 및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요’라는 것을 사란(寫蘭)을 통해 타인에게 평가받기에 추사는 창작 이전에 ‘성의정심(誠意正心)’과 더불어 신독을 강조한다. ‘불기심(不欺心)’은 ‘무자기(毋自欺)’와 의미하는 바가 같다. 율곡 이이는 ‘욕기영귀(浴沂詠歸)’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도 신독을 먼저 한 이후에 하라는 말을 한다. 이런 점을 보면 신독의 적용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에서 ‘자기를 속이지 말라[毋自欺]’, ‘불경한 짓을 하지 말라[毋不敬]’,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하라[思毋邪]’ 등을 강조하는 것도 이같은 신독 사유와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퇴계 이황이 ‘愼其獨[줄여서 愼獨]’이란 문구와 더불어 이상과 같은 문구들을 써 항상 자신의 거처에 걸어두면서 ‘지경(持敬)’을 강조한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추사 김정희, 〈불기심란도〉 전체와 부분.

“寫蘭亦當自不欺心始, 撇葉一點瓣, 內省不疾可以示人, 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 雖此小藝, 必自誠意正心中來, 始得爲下手宗旨.”



3. 『중용』 1장 : ‘계신공구(戒愼恐懼)’와 신독


『중용』 1장에서는 이같은 신독을 좀 더 심화시켜 군자의 바람직한 마음가짐과 행동양식으로 규정한다.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그 보이지 않는 바에 경계하고 삼가며[戒愼], 그 듣지 않는 바에 두려워하고 두려워한다[恐懼]. 숨어있는 곳[隱]에서보다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은 없고, 은밀한 곳[微]에서보다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는 데서 삼가는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사특한 마음[人欲, 私欲]을 품고 있으면 신독은 물 건너 간다. 아무리 은미한 것이라도 매사에 모든 것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니 은미한 것이 더 드러나게 된다. 무서운 말이다. 유학에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라[存天理, 去人欲]’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계신공구(戒愼恐懼)의 경외(敬畏)적 삶을 강조하는 이유다.


정약용(丁若鏞)은 “하늘[天]의 영명(靈明)함은 인간 마음에 직통하기에 아무리 은미한 곳이라도 다 환하게 비춘다는 점에서 신독하라고 한다. 신독의 경지는 유학자에게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강요되지 않는 ‘마음속의 주재적 하늘’을 통한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품격과 경지다. 정약용이 계신공구 하는 것을 무형체인 상제(上帝)가 인간의 선악과 관련된 형성(馨腥)을 다 알고 있는 상제를 ‘소사(昭事)’하는 것으로 규정한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혼자 있을 때도 마치 타인이 보는 것처럼 여기고 그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단속하는, 이른바 계신공구를 통한 경외(敬畏)적 삶을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경외적 삶과 관련된 모든 행동거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은 주희(朱熹)의 「경재잠(敬齋箴)」이다.


“그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시선을 존엄하게 하며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거처하고 상제를 대하는 듯 경건한 자세를 가져라.[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이상의 원칙에 입각해서 힘써 나간다면 이것을 일컬어 ‘지경(持敬)’ 공부라고 한다. 동하고 정함에 어긋남이 없게 하고, 안과 밖이 서로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잠시라도 중단하는 일이 있게 되면, 온갖 사욕이 기승을 부리게 된다.[朱熹, 「敬齋箴」 부분.]”


유학자들은 혼자 있을 때라도 정시(正視)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상태에서 마치 상제를 대하듯 경건한 자세를 강조한다. 이런 점에서 위좌(危坐) 혹은 정좌 자세를 유지하면서 ‘다리를 쭉 뻗거나 키 모양의 자세[箕踞 자세]’를 문제 삼는다. 그것은 몸가짐의 흐트러짐은 마음가짐의 흐트러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경’의 몸가짐을 강조하면서 항상 상제를 대하듯 하고 ‘사욕’이 기승을 부리는 것을 경계하는 이같은 「경재잠」은 신독을 통한 마음가짐이 실제 행동에서는 어떻게 표출되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잠언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홀로 있을 때의 모습을 그 누구도 보지 않는다고 여겨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흐트러트린다. 신독을 강조하는 이유는 설령 타인이 보지 않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양심’ 혹은 상제가 자신이 홀로 있는 정황을 하나하나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학에서는 항상 신독과 관련된 계신공구하는 경외적 삶을 강조하고, 이런 점을 사회적 관계에 적용하여 ‘자신을 단속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유의’하는 ‘지경(持敬)’을 요구하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자신의 마음속에 ‘자기만의 자발적인 CCTV’를 달고 살면서 언제라도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복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였다. 스마트폰이나 CCTV, 유전공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만인에 의한 실시간 감시’가 이뤄지는 오늘날이지만 과학기술이 남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속을 바라보는 경지인 신독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신독이 유효한 점이다.


[사진 위 : 퇴계 이황이 항상 벽에 붙여놓고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四箴〉. 양각 목판 인출본.

사진 아래 : 퇴계가 쓴 주희 「경재잠」 앞부분 : ‘正其衣冠, 尊其瞻視, 潛心以居, 對越上帝’]



4. 나오는 말


정약용은 “성인(聖人)이 신독과 성의(誠意)로 자신을 닦으면 백성들이 자연 감동되므로 바라보고 두려워하여 감히 ‘진실이 아닌 말[요즘 말로 하면 가짜 뉴스 혹은 소송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못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백성을 감화시키는 지극한 공(功)이다”라는 말을 한다. 사실상 군주(君主)에 해당하는 성인이 신독과 성의를 통해 ‘진실이 아닌 말[요즘 말로 하면 가짜 뉴스 혹은 소송을 불러일으키는 말]’을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