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서화’에 나타난 항일의식 (Ⅱ)

  • 482호
  • 기사입력 2021.12.28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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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3. 서예 작품을 통해 본 항일과 친일


동양문화에서 한 예술가의 작품을 평가할 때 적용되는 사유는 소식(蘇軾)이 말한 이른바 ‘서상기인(書像其人論)’에 입각하여 말한 “옛사람이 글씨를 논하는데 그 평생도 함께 논하니,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공교롭더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같은 발언을 우리 일제 강점기에 적용해보면, 안중근(安重根, 1879~1910)과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의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안중근의 글씨는 엄정하고 직선적인 당나라 안진경체 해서와 행서를 구사하여 유가의 중화(中和) 미학에 가까운 점이 있고, 아울러 글씨에 담긴 기운에는 안중근이 지향하는 유가의 ‘명도구세(明道救世)’ 정신에 입각한 출중한 기상이 담겨 있다. 북송대 미불(米芾)과 명대의 동기창(董其昌) 서풍을 본받았다는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에 뛰어난 장기를 보였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평가받기도 하는 이완용이 쓴 빠른 붓놀림으로 쓴 행서는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 서체로 띄고 큰글자와 작은 글자 및 굵은 획과 가는 획 등을 자유롭게 운용한 필획의 공교로움은 인위적 기교미가 물씬 풍긴다. 긍정적으로 보면 세련미가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감정의 기복이 심한 면이 있다. 이런 정황에서 글씨 자체를 통한 인물의 자질을 평가하는 것이 갖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것은 문장이다. 이런 점은 안중근과 이완용이 쓴 문구나 문장을 통해 살펴보자.


먼저 안중근이 쓴 글귀를 보자. 많은 글귀가 있지만 안중근이 쓴 글귀에는 『논어』를 비롯한 유가의 경전이나 군인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 같은 내용이 많다. 그 중 몇가지를 보자.


          

〈歲寒然後知松栢之不彫〉는 『論語』「子罕」의 “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의 ‘ 후조(後彫)’ 부분을 ‘불조(不彫)’로 쓴 것인데, 잘못 쓴 것일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쓴 것일 수도 있다. 의도적으로 ‘不彫’라고 쓴 것이라면 안중근이 그만큼 ‘歲寒[=일제]’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것으로 이해된다. 〈志士仁人, 殺身成仁〉은 『論語』「衛靈公」,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함으로써 인을 해하지 않으며 몸을 바쳐 인을 이룬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을 줄여서 한 말이다. 안중근이 쓴 모든 문장과 글귀는 사(私)보다는 철저하게 공(公)을 추구하고 아울러 애국충절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다.


그럼 이완용의 서예 작품을 보자.


                                        

이완용의 이 작품은 ‘갑자년(1924)’에 한 것이지만 관련 시는 경술국치 1년 전인 1909년 7월 9일 고종황제가 베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송별연 석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甘雨初來霑萬人[春畝] : 단비 처음 내려 만인을 적시니

咸寧殿上霑華新[槐南] : 함녕전 위에 이슬 빛이 새로워라

扶桑槿域何論態[西湖] : 일본과 조선이 어찌 다르다 하리오

兩地一家天下春[一堂] :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

甲子暮春 一堂 李完用 [李完用印][一堂] : 갑자년(1924) 늦봄에 일당 이완용.


소네 아라스케[西湖]가 ‘일본과 조선이 어찌 다르다 하리오’라고 하자 이완용은 ‘두 땅이 한 집 되니 천하가 봄이로다’라고 화답하여 이미 매국의 마음을 드러낸다. 작품에서 ‘一家’라고 할 때의 ‘일’자가 유난히 크게 쓴 것에는 ‘한일합병’이란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

두 번째 작품은 당대 현종 때 제상까지 오른 장구령(張九齡. 678-740)의 「答太常靳博士見贈一絕」을 쓴 것이다.


上苑春先入 : 궁궐의 동산에 봄이 먼저 드니

中園花盡開 : 동산 가운데 꽃이 다 피었네

惟餘幽徑草 : 오직 남아 있는 깊은 그늘 길의 풀들은

尙待日光催 : 아직도 햇볕이 빨리 들기를 기다리네


‘해[日]’는 전통적으로 제왕을 상징한다. 장구령이 읊은 정황은 몸은 강해에 있지만 마음은 군주의 사랑을 받는 위궐(魏闕)에 있는데, 아직 그런 임금[日]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유경초(幽徑草)는 자기의 직위가 낮은 것을 차유(借喻)한 것이다. 이에 성은을 입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달라는 시다.


그런데 이완용의 매국과 친일 행적을 감안하여 ‘尙待日光催’에서의 ‘日’자를 일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장구령과 달리 지위가 높았던 이완용이 매국 차원의 일향성(日向性)을 제시한 것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 친일 더 나아가 매국을 의도하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그것은 이완용 자작시인 ‘행서칠언절구’의 “피로써 이름을 다투는 것은 일을 버리는 어리석음이다 정성으로 밀어 대중에 미쳤으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당당한 신무(神武)는 천추의 사업이니 공명을 이룰 때가 바로 이때라네[以血爭名事却痴, 推誠及衆復何疑, 堂堂神武千秋業, 正是功成在此時]”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이완용이 '피로써 이름을 다투기보다도 조선의 집집이 ‘神武天皇’의 천추의 업을 이루자'고 한 것은 매국노로서 이완용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안중근이 글귀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을 한마디로 보여주는 것은 조선의 독립을 의미하는 〈獨立〉이다. 이완용의 의중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天下太平春〉이다.



▲ 안중근, 〈獨立〉


▲ 이완용, 〈天下太平春〉


〈천하태평춘〉은 말 그대로만 보면 참으로 좋은 글귀다. 그런데 누가 그런 ‘천하태평춘’을 만들어주는가 하는 그 주체와 연계하여 이해하면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즉 앞에서 쓴 글귀 내용이나 매국노로 낙인찍힌 이완용의 행적을 보면 결국 이완용은 일제 주도 하의 ‘천하태평춘’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하태평춘〉이 행여 민족말살정책의 하나인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한 상태에서의 친일매국행위라는 의도가 담겨 있다면 한민족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울분에 차게 하는 문구에 해당한다.


현재 안중근의 작품은 모두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것은 안중근 서예작품이 예술차원에서 뛰어났다는 점에 대한 평가가 아닌 애국충절에 대한 평가의 결과다. 안중근의 서예 작품에 담긴 항일의지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4. 나오는 말


매국노 이완용의 서예작품이 공개적으로 서화 시장에 나오지 못한 정황을 제외하면 친일행각과 관련된 혐의가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보였고 남긴 작품들도 많아 연구 대상이 되고 매매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서화를 통해 항일·반일 의식을 보였던 몇몇 인물들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 일제 강점기 활약했던 항일·반일 의식을 보인 서화가들의 작품 속에 실린 화제와 형상 등을 통해 토로한 역사 인식에 대한 분석과 그 작품들이 갖는 미학적 차원의 분석이 요청된다. 우리들에게 남겨진 ‘중차대’한 과제이다. 임중도원(任重道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