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소풍’의 철학적 유래 :
늦봄 증점(曾點)의 ‘욕기영귀’(浴沂詠歸)’Ⅱ

  • 490호
  • 기사입력 2022.04.29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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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3. 

전통적으로 관료로 근무하는 문인사대부들은 근무 여건상 은일 지향적인 삶을 살 수 없더라도 꽃이 피는 ‘늦봄[모춘暮春]’에는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증점의 ‘욕기영귀’가 지향한 삶을 누리고자 했는데, 중국유학자를 대표하는 주희朱熹도 예외가 아니었다. 


봄이 왔다는 소문은 방에서 학문에 열중하면서 경외敬畏적 삶을 살고 있던 주희의 몸을 근질근질하게 한다. 듣자니 서쪽 동산에 봄 정경이 볼만하다는 말이 들린다. 이에 행여 봄꽃이 질까 봐 황급히 짚신을 허겁지겁 신고서 집을 나와 서쪽 동산에 오른다. 갑자기 우연히 시흥도 떠오른다. 이에 「봄날에 우연히 짓는다(춘인우작春日偶作)」를 읊어본다.



         문도서원춘색심(聞道西園春色深) : 서쪽 동산 봄빛 짙다는 말 듣고

         급천망교거등림(急穿芒屩去登臨) : 황급히 짚신 신고 올라가 내려다보니

         천파만예쟁홍자(千葩萬蕊爭紅紫) : 무수한 꽃봉우리 붉은빛 보랏빛 다투는데

         수식건곤조화심(誰識乾坤造化心) : 하늘과 땅의 만물 만드는 마음 뉘가 알리오.



봄꽃이 활짝 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허겁지겁 짚신을 신고 달려가는 모습은 평소 경외적 삶을 지향한 주희의 모습과 딴판이다. 얼마나 봄꽃이 보고 싶었던가, 과연 동산에 올라가니 온통 붉은색과 보랏빛 색으로 물들인 꽃들이 장관이다. 온몸에 봄꽃이 알록달록 가득 물드는 서정성 가득한 봄날이다. 하지만 누가 철학자가 아니라고 할까 봐 주희가 꽃 핀 봄의 정경에서 느낀 최종적인 감동은 일반인과 달랐다. 대지에 가득 화려하게 핀 꽃을 보고 ‘누가 하늘과 땅[건곤乾坤]이 만물 만드는 마음’을 알겠냐고 하여 갑자기 화사한 서정적 봄의 느낌을 ‘철리哲理’가 물씬 풍기는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 전형적인 시인과 철학자의 차이다. 주희는 유학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는다.


이밖에 봄이 왔을 때 자연의 변화와 함께 하는 상황에서 절제된 ‘오여점吾與點’의 쇄락灑洛적 삶에 대해서도 「증점」에서 읊은 바 있는데, 그 정황을 보자.



         춘복초성려경지(春服初成麗景遲) : 봄옷 갓 지었으나 고운 경치는 더디네

         보수류수완청의(步隨流水玩晴漪) : 흐르는 물 따라 걸으며 맑은 잔물결 즐기네

         미음완절귀래만(微吟緩節歸來晚) : 느즈막에 나지막하게 흥얼거리며 돌아오다

         일임경풍불면취(一任輕風拂面吹) : 얼굴 스치며 지나가는 산들바람에 그냥 맡기네.



이제 추운 겨울이 지나고 기다리던 봄다운 봄이 왔다. 하루빨리 봄옷 입고 나들이하고 싶다. 봄옷은 다 완성되었고 옷을 입을 때만 오기를 기다리지만 야속하게도 봄은 더기기만 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봄옷 입고 야외 물가로 나왔다. 좋은 봄날을 만끽하기 위해 물가로 나와 불어오는 따사로운 봄바람에 그냥 흠뻑 취하면서 주희는 증점의 ‘욕기영귀’를 떠올린다. 전반적인 정취는 증점의 ‘욕기영귀와 유사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물가를 따라서 맑은 잔물결을 즐긴다‘는 것은 단순히 봄 경치를 즐기며 한가롭게 시간만을 보낸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유는 공자가 물가에서 물이 주야를 그침이 없이 흐르는 것을 보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흐른다’고 한 발언과 관련이 있다.


공자께서 시냇가에서 말씀하셨다. “가는 것이 이 물과 같구나! 밤낮으로 그치지 않도다.”


주희는 공자의 이 말에 대해 해와 달이 바뀌면서 사계절이 한순간의 쉼이 없이 순환 반복하면서 천지만물을 생생화육生生化育하는 ‘도체의 본래 그러한 것’이 마치 물이 밤낮으로 그침이 없이 흐르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물이 있는 야외에 나와서까지 철학적 시흥을 즐기고자 하는 주희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유학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얼굴에 불어오는 산들 바람에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것 같다.

주희는 공자가 가르침을 베풀던 사수 물가에 놀러 간 정황을 상상하면서 시를 읊기도 한다.   주희의 「춘일(春日)」을 보자.



         승일심방사수빈勝日尋芳泗水濱 : 좋은 봄날 ‘사수’가에서 봄 내음 찾으니

         무변광경일시신無邊光景一時新 : 끝없는 봄 풍경 한 번에 새롭네

         등한식득동풍면等閒識得東風面 : 여유롭게 봄 바람의 면모를 느끼니

         만자천홍총시춘萬紫千紅總是春 : 천만 가지 붉은 꽃이 온통 봄이구나.



‘사수泗水’는 공자가 ‘사수’ 물가에서 강학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곳으로, 흔히 공자 사상의 발생지라고 한다. 주희는 ‘사수’ 물가에 간 적이 없다. 따라서 ‘사수’ 물가를 거론하는 것은 공자를 생각한 것이면서 아울러 증점이 기수 가에 간 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한가롭게 따사로운 봄바람을 즐기고 있는 주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지 가득 핀 불붙는 듯한 붉은 꽃뿐이다. 봄날은 주야로 학문에 매진하던 주희에서 잠시 벗어나 사수 물가에 놀러 간 정취를 연상케하는 시인이 되게 하였는데, 이런 점은 주희처럼 신독愼獨과 경외敬畏의 삶을 살았던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욕기영귀’는 경제적 상황이나 신분에 따라 자주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제한된 놀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멋진 하루를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 ‘욕기영귀’를 오늘 한번 만이 아니라 내일도 하고 싶다. 이런 점에서 “자연에 나갔다가 다시 현실적 삶으로 돌아온다[왕이귀往而歸]”를 기본으로 하는 ‘욕기영귀’는 유가와 도가가 공존하는 경지에 속하기도 하는데, 이같은 ‘욕기영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꾸만 자연과 함께하면서 노니라고 유혹한다. 이에 주희는 절제되지 않는 ‘욕기영귀’는 ‘광狂’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고 아울러 노장老莊에 빠진다고 경계한다. 당연히 주희를 추존하는 조선조 선비는 주희의 이같은 경계를 잊을 수 없다. 그런데 조선조 유학자들이 주희의 경계하는 말을 떠올릴수록 역설적으로 ‘욕기영귀’하고자 하는 마음은 더욱 솟구친다. 이에 앞서 ‘욕기영귀’와 관련하여 직접 야외의 물가에 나갈 수 없는 경우 자신이 사는 공간 주변에 ‘욕기영귀’를 상징하는 ‘영귀대詠歸臺’, ‘영귀정詠歸亭’, ‘풍욕루風浴樓’ 등과 같은 건축물을 지어놓고 제한된 풍취와 운치를 즐기고자 하였다.


‘조선조 유학자의 경우 이같은 증점의 ‘욕기영귀’는 늦봄에 야외 공간에서 단순히 하루를 보내는 유희적 차원에서 즐긴 것을 의미하는 것보다는 이이李珥같은 경우는 도에 대한 체득, 수양론 차원에서 접근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제한된 점이 있더라도 경외 아닌 쇄락을 추구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어 논한다면, 증점의 ‘욕기영귀’는 조선조 유학자들이 지향한 삶이었다. 이에 조선조 유학자들은 다양한 시어를 통해 ‘욕기영귀’의 풍취와 즐거움을 읊고 아울러 그런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바람을 보였다. 그 바람에는 조선조 유학자들이 추구하고자 한 자연 친화적 삶에 대한 추구와 동경이 담겨 있다. 조선조 유학자들에게 증점의 ‘욕기영귀’가 노장의 질탕跌宕함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록 하루라는 제한된 일정에서 행한 ‘욕기영귀’이지만 예법이 지배하는 삶의 공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자연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동시에 항상 무엇인가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해야 한다는 정신적 압박감과 숨 가쁘게 바쁜 일상적 삶에서 잠시나마 한숨을 돌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욕기영귀’의 의미가 있다.


4.  

이처럼 증점이 하고자 한 ‘욕기영귀’의 풍취는 동양의 문인사대부들에게 쇄락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에 그들은 신독과 경외가 상징하는 이성적이면서 정제 엄숙한 삶을 유지하는 가운데 잠시 벗어나 짧은 봄날 한나절의 흥취를 즐길 수 있었다. 왜 봄에 소풍을 가는가 하는 이유다.


[무기연당舞沂蓮塘].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에 위치한 조선 후기의 연못.

 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운 의병장 주재성(周宰成)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연못가에는 후대에 지은 풍욕루(風浴樓)와 하환정(何換亭)이 있고, 연못 주위에는 담장을 쌓고 일각문을 내어 영귀문(詠歸門)을 지었다. 증점의 ‘욕기영귀’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긴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