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서화’에 나타난 항일의식 (Ⅰ)

  • 481호
  • 기사입력 2021.12.07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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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일제가 만주사변을 앞두고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와 사군자를 출품 부분에서 제외한다. 그 이유로 서예와 사군자는 묵희 차원의 예술, 소인[素人:아마추어] 예술, 봉건시대의 유물이란 점을 든다. 그런데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다. 친일행각을 벌인 인물들이 서예와 사군자를 출품 부분에서 제외하라고 앞장 선 것을 참조하면 조선인들이 서예와 사군자를 통해 표현될 수 있는 항일, 반일 의식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고 본다.


2. 회화작품에 나타난 항일·반일 의식


동양문화권에서 맑고 고운 향기를 지닌 난의 의미에 대해서는 흔히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 말한 “난초는 깊은 숲속에서 나서 사람이 없다고 향내를 감추지 않는다. 군자는 도를 닦고 덕을 세움에, 곤궁하다고 절개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거론하곤 한다. 이처럼 비덕(比德)차원에서 이해된 난은 군자의 지조와 절개의 상징성을 지니는데, 일제 강점기에 총칼로 일제에 저항할 수 없었던 항일 서화가들이 소극적 저항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아울러 대나무도 마찬가지였는데, 주목할 것은 작품에 기재된 화제를 통해 자신의 울분을 토로한 것이다.


이런 점은 세가지 정도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가장 소극적인 저항방식으로,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마음을 은일 지향의 삶을 난이나 대나무에 담아 표현하되 관련된 화제를 통해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군자의 이미지를 드러내곤 한 것이다. 소극적 반일서화가인 경우는 대부분 은일적 삶을 살면서 반일의식을 전개하는데, 윤용구(尹用求, 1853~1939)의 아래 작품은 이런 점을 보여준다. 


작품에 기재된 화제를 보자.



윤용구는 난을 치고 쓴 두 화제에서 모두 당시 현실의 부귀영달을 추구하지 않고 홀로 고고하게 은일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피력하고 있다. 난을 통한 소극적 저항을 보인 예에 해당한다.


다음, 망국의 슬픔과 고통을 뿌리내릴 땅[나라]을 잃어버려 뿌리가 드러난 ‘노근란(露根蘭)’이나 송(宋)의 유민인 정사초(鄭思肖)가 땅이 없어 뿌리가 기거할 땅이 없어 뿌리를 그리지 않은 ‘무근란(無根蘭)’을 통한 망국의 슬픔과 고통을 표현한 것을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윤용구, 김진우(金振宇, 1883~1950) 등이 노근란을 통한 망국의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閔泳翊, <露根墨蘭圖>, 紙本水墨,  128.5×58.4㎝, 호암미술관 소장.  閔泳翊, <露根墨蘭圖>, 紙本水墨, 호림미술관 소장.



 尹用求, <山水花鳥六幅屛風> 중 <墨蘭圖>, 紙本水墨, 23×20cm, 개인소장(왼쪽).  金振宇, <墨蘭圖:屈宋文章>, 紙本水墨, 36×27cm, 밀양시립박물관



민영익과 윤용구 및 김진우가 노근란을 통해 망국의 정황을 표현했지만 김진우의 노근란은 의미하는 바를 더욱 강하게 보여준다. 난 잎이 뭉퉁뭉퉁 잘린 것은 그만큼 시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난이나 대나무가 자라기에는 최악의 환경인 가파른 절벽에 뿌리를 내린 난들이 긴 잎을 벼랑 아래로 길게 드리운 현애도수란(懸崖倒垂蘭)과 도현란(倒懸蘭) 및 도수죽(倒垂竹) 등과 같은 형상으로 표현한 것을 들 수 있다. 윤용구는 이른바 단애도수란(斷崖倒垂蘭)을 통해서 은일적 삶과 저항 의식을 보인다.




나무꾼을 일본으로 바꾸어 이해하면 이 시는 일제가 군자인 난초를 꺾으려 해도 꺾지 못하는 정황을 읊은 것에 해당한다. 


대나무는 ‘능운지기(凌雲之氣)’를 가진 식물로 묘사된다. 따라서 대나무는 구름을 뚫듯 위로 꼿꼿하게 위로 치켜 올라가는 형상으로 그려진 것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꼿꼿한 군자의 이미지다. 하지만 북서풍의 숙살지기(肅殺之氣)에 의하거나 혹은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대나무 줄기가 위로 자라지 못하고 짤리고 꺾이면서 밑으로 가지를 내린 대나무 형상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상징한다. 아래 그림들은 이런 점을 잘보여준다.


                                       1. 朴基正, <倒垂竹>(목죽 10폭 병풍), 종이, 130.3×30.3cm, 최열 소장(왼쪽)

                                       2. 金振宇, <倒垂竹)>, 128.7×31.5cm, <王竹>, 종이, 128.6×30cm, 최열 소장(가운데 두개)

                                       3. 鄭大基, <묵죽 8폭 병풍> 중 〈倒垂竹〉, 연대미상, 종이, 94.5×31, 최열 소장(오른쪽)


위의 그림 가운데 최열은 김진우의 <倒垂竹>은 여순감옥에서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옥사에 이어 상해에서 일제 요인 암살단인 맹혈단(猛血團) 검거 소식이 들려오던 1936년 춘삼월에 그린 작품이라고 본다. ‘빈집은 밤새 춥구나[空堂一夜寒]’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는 화제시는 명나라 시인 이동양(李東陽, 1447-1516)의 것인데, 이역만리에서 체포당해 옥중에서 고문으로 스러져간 투사의 위대함에 대한 헌정의 뜻을 머금은 것이라고 말한다.


회화는 서예에 비해 시각적 효과에서 상대적으로 더욱 강렬한 항일·반일 의식을 표현할 수 있다. 이런 점은 소극적 차원에서는 일제에 타협하거나 굴종하지 않는 차원에서 은일적 삶을 지향하는 삶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적극적 차원에서는 도수죽, 도수란 등과 같은 형상을 통해 표현하되 때론 꺾이고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형상을 통해 고통받는 시절과 더불어 저항의식을 동시에 토로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