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도래에 따른 풍수·명리 철학화 단상 (Ⅱ)

  • 486호
  • 기사입력 2022.03.02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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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풍수의 철학화 모색 조건 단상


글 : 조민환 동아시아학과 교수

 

풍수와 명리가 철학 차원에서 인정 받으려면 우선 과거 유학자들이 제기한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다산 정약용의 풍수론에 대한 문제 제기 및 비판을 보자.


기주(冀州)나 연주(兗州)의 들판은 끝없이 넓어 언덕이라고는 없다...용호(龍虎)나 사각(砂角)의 경관은 없어도 이들의 부귀는 전과 같으니, 길지를 구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영웅호걸은 총명과 위엄과 재능이 일세를 통솔하고 만민을 부리기에 충분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살아서 명당 위에 앉아 있을 때도 오히려 자기 자손을 비호할 수가 없어서, 자손들이 요절하는 경우도 있고 폐질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죽은 이후의 말라 비틀어진 무덤 속의 뼈가 아무리 산하의 좋은 형세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기의 후손을 잘 되게 할 수 있겠는가.


중국의 기주나 연주의 들판은 끝없이 넓어 언덕이라고는 없는 정황, 이른바 풍수라는 차원에서 접근할 수 없는 정황에서 선택한 묫자리였지만 후대에 복록을 받고 자손이 번성하고 영달도 전과 같았다는 발언은 풍수에서 길지에 해당하는 묘 자리를 선택했을 때의 자손번영 등과 같은 발복 차원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하는 것을 의문시하게 한다.


정약용이 특히 ”죽은 이후의 말라 비틀어진 무덤 속의 뼈가 아무리 산하의 좋은 형세를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자기의 후손을 잘 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길지 선택과 관련된 발복의 문제점을 제기한 것은 풍수에서 말하는 동기감응론을 통째로 부정하는 발언에 해당한다. 총명과 위엄과 재능이 일세를 통솔하고 만민을 부리기에 충분한 영웅호걸이 살아서 명당위에 앉아 있을 때도 오히려 자기 자손을 비호할 수가 없어서, 자손들이 요절하거나 폐질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은 그 영웅호걸의 부모를 발복지에 장사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 대해 정약용은 이같은 풍수를 신봉한 사람들이 과연 자신을 포함한 후손이 발복했는가 하는 점과 관련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예로 들어 풍수의 발복 논리를 비판한다.


곽박(郭璞)은 죄없이 참형(斬刑)을 당한 뒤 시체는 물속에 던져졌으며, 도선(道詵)과 무학(無學) 등은 모두 중이 되어 자신의 종사(宗祀)를 끊었으며, 이의신(李義信)과 담종(湛宗)은 일점의 혈육도 없다. 지금도 이런 자들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일생토록 빌어먹고 사는가 하면 자손들도 번창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풍수의 경전급에 해당하는 『장서(藏書)』[=錦囊經]를 지었다는 곽박이나, 이의신, 담종 등의 예는 길지 선택과 발복 논리와 전혀 관계가 없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일점의 혈육이 없다는 것은 유가의 효 관념 중에서 ‘무후(無後)’를 가장 큰 불효로 여기는 입장에서 볼 때 무엇보다도 큰 문제가 된다. 이에 정약용은 묘자리를 선택하는데 방위의 상충과 상합을 통한 길흉 판단과 관상법을 통째로 부정한다. 정약용의 이같은 풍수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 제기는 풍수의 순기능을 무시한 역기능 측면만을 역사적 실례를 통해 제기한 것이란 비판이 가능한데, 이런 점에서 풍수의 순기능을 제대로 밝힐 수 있는 다양한 접근방법이 요구된다.


오늘날 상황에서도 여전히 발복을 목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천장(遷葬)은 풍수가 갖는 동양전통문화에서의 순기능과 긍정적인 면을 송두리째 폄하하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런 정황에서 풍수가 동양문화에서 긍정적으로 기여한 분야가 무엇이 있는 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조선조 정약용을 비롯한 유학자들이 길지 선택과 관련된 발복 차원의 풍수론을 비판한 것은 나름 타당성이 있다. 그 비판에 대해 동양문화에서 풍수가 갖는 순기능과 관련된 풍수차원의 설득력 있는 답변이 있어야 한다. 풍수의 순기능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통해 오늘날에 적용될 수 있는 다양한 신풍수론이 요청되는 이유다.


4. 명리의 철학화 모색 조건 단상


명리도 철학 차원에서 보다 폭넓게 논의되려면 우선 조선조 유학자들의 명리에 대한 의문점에 대한 철학적 답변을 해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명리학은 흔히 추명학(推命學)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의 네 간지(干支)인 사주(四柱)를 기초로 운명과 길흉화복을 예견하는 점법을 이른다. 김창협은 이같은 추명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론적인 비판을 가한다.


대저 오행은 천지 사이에서는 승강운행하고 착종변화하는 것으로 어느 한때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천하가 큰 것으로써 고금의 멀리 떨어진 것을 계산하면 인간의 년월일 때가 같은 자는 기천만인이 되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수요·귀천·빈부·길흉에 어느 것 하나도 같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다면 조화가 된 것은 또한 쉽게 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금에 부귀와 수록(壽祿)으로써 한 때에 이름을 날린 자가 동시에 동명(同命)했다는 것은 절대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그것을 의심하는 두 번째다...사람이 어찌 일진(日辰) 간지(干支)의 오행이 스스로 천지간에 유행하는 오행과 더불어 서로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아직 잘 모르겠다.


유학에서는 실리(實理)라는 입장에서 천도를 이해한다. 예를 들면 이이(李珥)가 「신선책(神仙策)」에서 “천지의 이치는 실리일 뿐이다. 사람과 만물의 생성함을 실리에 의하지 않음이 없으니, 실리 이외의 설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깨닫는 군자의 믿을 만한 바가 아니다”라는 사유가 그것이다. 김창협은 성리학의 이기론을 통해 “오행은 천지 사이에서는 승강운행하고 착종변화하는 것으로 어느 한때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명리의 오행 불변 사유를 통한 정명(定命)적 사유를 비판한다. 천도를 실리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는 경우 인간의 일진과 간지의 오행은 천지간에 유행하는 오행과 동일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명리학의 논지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동년·동월·동일·동시에 태어난 사람들의 명리가 동일하다는 문제제기도 타당한 면이 있다. 팔자의 명리학은 현재 두시간의 간격을 하나의 시진으로 보고서 팔자의 구조에 위치를 정해 놓은 것이 갖는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는 지도 엄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철학 차원에서 명리학의 시조격으로 알려진 왕충(王充)은 기품론(氣稟論)을 통해 생명이 탄생할 때 인간의 평생 명운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그것의 또 다른 근거는 음양론이다. 왕충은 아울러 원기자연론(元氣自然論)을 통해 삶과 죽음, 장수와 요절과 관련된 ‘수명(壽命)’과 빈부와 귀천과 관련된 ‘녹명(祿命)’이란 두가지 관점에서 파악하면서, 몸의 건강 및 장수와 요절을 기의 악강(渥强)과 박약(薄弱)으로 귀결한다. 특히 부모가 기를 주는 과정에서 한 인간의 길흉이 주어진다고 한다. 일종의 자연정명론 혹은 명운결정론을 주장하는데, 이런 사유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명리의 철학화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귀곡자(鬼谷子)의 발언을 보자.


오행 밖으로 나온 사람은 삶과 죽음이 자신에게 달려 있지만, 맑음과 흐름 안에 머문 사람은 생존과 멸망이 운수에 따른다.


주석: 덕을 닦고 본성을 함양하여 거짓됨을 교정하고 진실함을 지키며 영험함이 내부에서 고요하고 돌이켜 회복하여 원으로 돌아가면 신묘함이 육합의 밖에서 노닐고 반드시 오행에 앞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살고자 하는 것과 죽고자 하는 것, 감추고자 하는 것과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모두 나에게서 나온다. 이러한 사람을 신선과 진인(眞人)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어찌 천지 귀신, 때의 운수 때문에 구속되겠는가? 이는 사람이 스스로 수양하도록 해야 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명에만 얽매여서는 안된다.


명리가 갖는 운명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런 발언에 대한 논의는 명리의 철학화에 일조를 할 수 있다. 아울러 명리가 기의 강약후박과 관련된 점이 있다면 후천적 수양을 통한 기질변화의 가능성[矯氣質]을 인정하는 것도 명리가 철학화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다. 이런 점은 AI명리가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5. 나오는 말


궁극적으로는 풍수와 명리는 둘이면서 하나다. 루즈지[陸致極]는 명리학의 이론적 근거는 천인합일론과 왕충(王充)의 기일원론이고, 도구적 분석은 음양오행의 간지(干支)부라고 하면서 가정과 국가가 동일한 구조를 가진 봉건적 질서가 명리학을 탄생하는 역사적 토양을 제공했음을 말한다. 과거의 신분제 사회가 아닌 ‘개천에서 용이 나고’ 진승(陳勝)이 말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王侯將相寧有種乎]’ 하는 외침이 설득력을 갖는 오늘날은 과거 봉건적 질서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의료기술과 약품 발달에 의한 질병치료 및 수명연장 가능성, 명리학이 사계절 순환반복에 의한 농경적 삶속에서의 적전(積澱)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기후변화에 따른 음양 기운의 변화,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 아닌 인공수정에 의한 태아 탄생, 윤리적 문제가 있지만 유전자 조작을 통한 아기 탄생 가능성, 아파트 환경의 차경(借景)적 꾸밈, 매장 아닌 화장문화 성행 등에 대한 풍수명리 차원의 철학적 답변도 요구된다. 이밖에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현대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풍수명리적 차원의 접근방식도 요구된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과거 봉건사회도 아니고 사농공상이란 직업 차별적 차원에서 인간의 행복이나 재부를 규정했던 것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점에 대한 인식은 AI풍수명리가의 도래를 앞둔 시점에서 풍수명리의 철학화는 오늘날에 살아있는 ‘신풍수명리’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과 관련이 있다.


[딩시위안 지음, 이화진 옮김, 『예술풍수』, 일빛.]



동양 산수화론에는 “그림에도 풍수의 이치가 담겨 있다[畵亦有風水存焉]”라는 말이 나온다. 이런 점에 대해 위 책에서는 “천지 우주 간의 삼라만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기(氣)뿐이다. ‘예술풍수’란 예술에 내재된 기의 움직임이다. 예술이 시공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시공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위치, 예컨대 공간예술인 회화는 그림 속에 내재된 기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그림 본연의 정체성과 터치의 리듬감, 일정한 규칙성이 표현되며, 여기에는 일정한 방향성과 경향, 추이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술풍수다”라 하고 있다.








[북송 이성(李成), 〈청만소사도[晴峦萧寺图]〉]

이성이 그린 것으로 일컬어지는 작품으로 화면의 구도는 유교 이념으로 무장한 송 제국의 구조가 담겨 있다고 평가한다. 가운데 주봉이 우뚝 솟은 것은 마치 천자가 군림하는 듯하고, 주변에는 낮은 산들이 늘어선 것은 마치 신하들이 옹위하다고 여긴다. 우리나라 만원권의 도안으로 채택된 조선조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이성의 산수화는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 작품은 동양의 풍수론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