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불급(不狂不及), 야구에 미치다.
양해영(독어독문학 81) 동문의 이야기

  • 524호
  • 기사입력 2023.09.28
  • 취재 이채은 기자
  • 편집 김희수 기자
  • 조회수 3940

145g의 작은 공으로 만들어지는 야구라는 드라마. 이번 ‘인물포커스‘의 주인공은 35년간 그 드라마의 한 축과도 같은 역할을 해온 양해영(독어독문학 81) 동문이다. 양해영 동문은 지난 2017년까지 한국 야구협회(KBO)의 사무총장으로 재임했으며 현재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 부회장을 맡고 있다.


KBSA는 프로 야구를 제외한 모든 야구 리그를 관장하는 단체이다. 2017년, 양해영 동문은 KBSA 실무 부회장직을 겸임하며 프로야구와 아마추어 야구계의 공조를 끌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야구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아마추어 야구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양해영 동문이 가진 커리어를 더욱 반짝이게 한다. 한국 야구계의 기틀과도 같은 양해영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성균웹진 독자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KBSA 부회장 양해영입니다. KBO에서 2011년부터 2017년까지 사무총장으로 지낸 후 현재는 아마추어, 대학 야구 등을 관장하는 대한야구소프트볼 협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 2017년까지 KBO 사무총장으로 계시고현재는 KBSA라는 단체의 부회장직으로 계십니다. KBSA는 야구팬들에게도 조금 생소한 단체인데요, KBO가 하는 일과, KBSA가 하는 일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KBO는 프로야구에 대해서만 관리, 운영이 이루어지는 단체입니다. 반면 KBSA는 프로야구를 제외한 대한민국의 모든 야구, 소프트볼 관련 사무를 관장하는 곳이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초/중/고/대학 야구는 물론 여자 야구, 소프트볼, 사회인 야구 등 프로야구를 제외한 모든 분야를 다루다 보니 일 하는 범위는 훨씬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야구는 워낙 대중들의 관심을 많이 받아서 KBO에서 사무총장직을 수행할 때는 지금보다 더 신경 쓸 일이 많았습니다. KBO 사무총장으로서는 프로야구의 경기 운영, 분쟁, 대외적 홍보 등 거의 모든 일들을 관할했어요. 특히 구단 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에요. 하다못해 드래프트 제도를 변경할 때도 구단의 유불리나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요. 그래서 조금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어요(웃음). KBSA 부회장으로 일하는 지금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보람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아마추어 야구에 있는 많은 문제를 안정화하고, 아마추어 야구의 저변을 확대하고 인기를 회복하는 다양한 일들을 하고 있어요. 새롭게 뭔가를 만들어 나가고 보람을 느끼는 일이 많습니다.


아마추어 야구는 프로야구에 비해 대중들의 관심도 작고 지원도 작습니다다행히 지금은 프로야구와 아마추어 야구 간의 공조가 잘 이루어지고KBSA에 대한 지원도 많이 늘어났는데요이런 변화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가 있나요?

사실 2016년에, 한국 프로야구 협회가 '사고단체'로 지정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대한 체육 협회에서 사고 단체로 지정하고, 대한 체육 협회가 한국 프로야구 협회를 관리/운영했습니다. 동시에 대한 체육 협회와 국민 생활 체육 협회가 통합된 체육계의 큰 변화도 있었습니다. 초/중/고 그리고 사회인 야구계까지가 통합된 것이죠. 이때 제가 KBO사무총장을 맡았던 시기인데, ‘아마추어 야구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김응용 회장님이 KBSA 회장을 맡으셨는데, 김응용 회장님 체제하에 KBO가 아마추어 야구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자금 지원과 행정적 지원을 맡게 된 거죠.


아마추어 야구 실무를 맡으면서 아마추어 야구계에 대한 행정적 안정, 그리고 수입원이 없다는 아마추어 야구의 운영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금전적/행정적 지원이 많이 이루어지고 프로야구와의 유기적 공조 체제가 완성되어서 아마추어 야구계의 변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추어 야구계에 대한 공조가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지만요즘 프로로 지명된 신인 선수 중에서는 지명되기도 전에 너무 많은 투구 수를 소화하고 부상을 입는 등 여전히 혹사 문제는 남아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말씀하시는 혹사 문제는 제가 KBO 사무총장직을 겸할 때, 이미 어느 정도 해결되었습니다. 제가 혹사 문제에 대한 인식을 여실히 하고 있었어요. 고등학교 때 유망주였던 선수들이 프로 구단에 지명되어 입단 후에 바로 하는 일이 수술이었을 정도로 제대로 뛰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수들은 그냥 프로 야구계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제대로 야구 인생을 소화하지 못하는 등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거죠. 그때부터 이미 투구 수 제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투구 수 제한에 대한 이미지 정착을 유도했어요. 당시 일선 지도자들은 반대했지만, 저는 선수들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지금은 혹사 문제에 대한 논란이 예전처럼 많이 불거지지는 않아요. 연투가 길어지는 것에 대한 남아있는 논란은 경기 운영, 경기 환경을 고려한 어쩔 수 없는 구단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만큼 혹사 논란이 많이 나타나지는 않는 것이 양해영 동문님 덕분인 것 같습니다. KBO 사무총장을 겸직하실 때 비디오 판독 프로그램도 도입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비디오 판독 프로그램에 대한 중장기 발전 방안은 무엇일까요?

비디오판독 프로그램에서는 처음에 가장 큰 문제가 시차 문제, 그러니까 심판이 볼 카운트를 하기까지 판정이 전달되는 시차 문제에 있었어요. 그런데 이건 기술의 발전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남은 문제는 스트라이크존의 설정 문제에요. 스트라이크존의 넓이나 크기는 야구계의 공감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전체 야구계가 일관되게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면 이 문제도 해결되고 야구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비디오 판독 프로그램을 빨리 도입하기로 한 이유가 있어요. 고등학생 선수들에게 아마추어 야구는 대학에 가기 위한 도구의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판정에 의해 억울한 상황이 생기고 대학 진학에 불이익을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대학 진학에 불공정성이 생기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이 프로그램을 빨리 도입했습니다. 최대한 방송사에서 비디오 판독에 대한 중계를 많이 하도록 부탁해서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사라지도록 노력했어요. 아마추어 야구 선수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디오판독 프로그램이 출발한 거라 볼 수 있겠습니다.




| 올해 초성균웹진 인물포커스‘ 섹션에는 우리 대학 야구부 이연수 감독님에 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이연수 감독님과 인터뷰를 하면서 저도 대학 야구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요대학 야구 활성화과연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요?

대학 야구도 KBSA가 관할하는 문제이긴 하지만, 대학야구연맹이라는 단체를 통해 독자적으로 운영되며 그 자율성이 보장되고 있습니다. 다만 대학 야구 경기 자체가 많이 개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1년에 10게임밖에 참여하지 못하는 학교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보면 당연히 선수들의 기량이 떨어집니다. 게임을 소화할 기회 자체가 적다 보니 대학에 진학한 선수들이 경기 기회가 많은 지방으로 이동해서 실력을 키우는 경우도 허다해요.


더불어 대학에 진학한 선수들에게 공정한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공부하는 운동선수'를 만든다는 미명 하에, 선수가 아닌 학생들과 동등한 학업 성과를 요구하는 상황 자체가 불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들이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기량이 떨어지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교육계와 행정계가 발맞추어 함께 야구 선수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KBO 사무총장에 6년간 몸담으시면서 프로야구 10개 구단 체제 완성 등 많은 성과를 내셨습니다. KBO 사무총장직이 끝난 지금아쉬움이 남지는 않으신가요?

글쎄요. 10개 구단 통합 마케팅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게 아쉽네요. 구단별로 각개 전투를 하는 시스템을 통합하고 싶었거든요. 10개 구단이 경쟁하는 것과는 별개로 10개 구단이 함께 협업해서 상품을 출시하고 로드샵을 만들어 티켓을 판매하는 등의 마케팅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프로야구가 자본주의적 성격이라는 것도 맞지만, 10개 구단이 같이 수익을 창출하고 야구계의 발전을 이끄는 사회주의적 성격도 존재합니다. 10개 구단의 협업 마케팅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루어지지 못해서 조금 아쉽네요.




체육 전공을 하신 것도 아니고우리 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셨습니다어문 계열 학생이 졸업 후 KBO에 입사해서 35년간 야구계에 몸담은 것이 살짝 의아하게 느껴지는데요, KBO에 입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학생 때부터 워낙 운동을 좋아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육상 대표, 중학교 때는 축구부로 활동할 만큼 오랫동안 운동을 좋아했어요. 운동에 전념하다 자꾸 성적이 떨어져서 집에는 운동하는 걸 비밀로 했을 정도입니다(웃음). 중학교 때 운동을 그만두고 재수를 하고 있을 때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연락이 왔어요. 사회인 야구단을 만들건데 같이하자고 말이죠. 그때 함께한 동창 중에 성균관대 킹고야구반 소속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를 계기로 대학에 진학해서도 킹고 야구반에 가입하면서 대학 내내 야구에 미쳐서 살았던 것 같아요. 수업에는 가끔 들어가고, 거의 킹고 야구반 동아리방에 살다시피 했습니다. 체육과 학생으로 오해도 많이 받아서 ‘쟤는 체육학과인데 왜 독문학을 부전공하냐‘는 말도 들었어요.


그러던중 학교로 KBO에서 추천장이 와서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야구에 미쳐서 사는 걸로 학교에 소문이 나 있어서 체육학과 교수님들께서도 당연히 저를 보내셨습니다.


처음 KBO에 입사해서는 총무/관리직을 수행했어요. 당시 빙그레 이글스가 KBO 리그에 들어오면서 가입금 30억을 야구회관 건립에 썼던 시기라, 건물 관리 등 총무 업무를 담당했던 기억이 납니다.


야구에 미쳐있었던 양해영 동문님의 대학 시절이 더욱 궁금해지는데요대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제가 1학년 때, 성균관대와 서울대의 야구 정기전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성서전‘이라고 불렀던 대회인데,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야구부와 대운동장에서 경기를 펼치게 되었어요. 대운동장 옆 펜스에 관중들이 다 달라붙어서 구경하고, 유명 개그맨이 경기 중계를 할 정도로 인기있었던 대회였습니다. 그때 제가 대표로 서울대 야구부를 우리 캠퍼스로 데려오기로 했습니다. 당시에는 시위가 많은 시기어요. 서울대 사회과학대생 한 명이 시위 도중 투신 하는 일이 일어난거예요. 그래서 경기 도중 모든 선수들이 추모하는 마음으로 까만색 리본을 달고 경기를 한 것이 기억에 남네요.


| 30년가량의 야구 인생이 양해영 동문님께 큰 의미일 것 같습니다양해영 동문님께 야구란 한마디로 무엇인가요?

업보죠(웃음). 야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고,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도 않다 보니 야구가 제 업이 된 것 같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봉사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즐겁긴 해요. 남을 위해서 일한다는 게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KBSA에서 어린 학생들을 보고 있다 보면 즐거움과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성균관대 학생들그리고 야구계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불광불급‘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학교 때 동아리 후배들에게도 해줬던 말인데,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의 한자 성어입니다. 어떤 일이든 좋아하는 것에 빠져서 열심히 하다 보면 뭔가 이룰 수 있습니다. 저도 학교 다니면서 야구에 미쳤다는 소리를 허다하게 들었거든요. 친구들이 걱정도 많이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야구라는 분야에 미쳤고 나름대로 원하는 자리에 와서 보람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만큼 이룰 수는 없지만,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서 돈을 많이 벌어라, 유명해지라 같은 뻔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몰두해서 재미를 느끼고 만족할 수준까지 다가가면 사람이 행복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