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김두환선배(약학 56)를 찾아서

  • 156호
  • 기사입력 2008.05.13
  • 취재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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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깔스런 꾸밈씨·어찌씨만 보면 미칩니다” 


              蘭 3


   눈자라기 눈웃음 정
   간질인다
   눅인다
   감친다
   채운다
   얼뺀다


          어느 그리움 -녹음 감상기

           뚝뚝 흘리므로 무장 흘리므로
           차오르다 차오르다 차오르다
           스스로를 잠그고 푹 잠그고
           스스로를 우려 내고 흠씬 우려 내다가
           남실남실 넘치면서
           무넘기 쪽 조르르 흘러내리면서
           힐끔 흘러보면서
           흠칫 휘어잡으면서 꼼짝없이 붙들고
           이 가슴팍에 내다질 뚫어
           새지 않을 만큼 속속 아귀아귀 깊이
           그걸 밀어넣어 주는고나


위 2편의 시는 원로시인 김두환님(73)이 최근에 쓴 시이다. 이렇게 독특한 우리말 시를 읽어보신 적이 있는가. 누가 우리말이 쉽다고 했나. 그런데도 처음 본 이런 시어들을 몇 번이고 읊조려보면 그 뜻을 알 것도 같다. 낯설다가도 더러는 살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매 단풍 들것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모란이 피기 까지는’를 쓴 김영랑시인의 시를 읽어본 적이 있으리라. 그를 기리는 제2회 ‘영랑문학상’을 수상한 김두환시인을 찾아 나선다.

살려 쓰고 싶은 우리말들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말과 글은 외래어와 국적불명의 외국어 홍수 속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있다. 나랏말의 혼돈 속에 40여년째 주옥같은 시를 1천여편 써 <읊은 가락에 영그는 그리움> <잔을 나눌 그 일만 남았는가> <아침 커피 한 잔> <가을비 박람회> <때 늦은 발견> <깊은 밤 깊어가는 이야기> <더위 잡아 오르지만 별자리는 아직 멀고> 등의 시집을 낸 원로 김두환시인이 자랑스럽게도 우리의 선배가 아닌가. 호는 운사(耘史). 10회 허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0년대 말, 지금도 도시락을 싸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제법 있다 하지만, 그때는 너나할 것 없이 가난하고 옹색했다. 당시 성균관대 약학과를 다니던 시인 김두환동문은 이렇게 회상했다. “시골 중농출신이긴 했지만 학교 다니기는 힘들었습니다(전남 순천산, 광주고등학교 를 8회로 졸업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 몰래 창경원(현 창경궁)으로 들어가(당시는 담이 헐어 있었음) 혼자 물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쳐다보며, 당시(唐詩)를 원문(原文)으로 읽곤 했지요. 친구들 신세를 늘 질 수도 없고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고도 했구요. 그때 암송하던 당시가 약대 출신인 저를 평생 시인의 길로 이끈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아주 짧은 거리도 다 차를 타고 다니지만, 당시는 서울시내 웬만한 곳은 다 걸어 다녔어요. 동대문에서, 미아리에서, 심지어 수유리에서도 걸어 다니는 학생들이 있었지요. 원로 값하겠다고 잔소리하는 것같아 미안하지만, 학생들이 너무 고생을 모르고 커서 큰일이에요. 옛말에 ‘초년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는데”

*약대 다니며 배고픔 참아가며 시 쓰고 학교신문 만들던 시절이 어제련듯…*

김동문이 당시를 술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집안이 대대로 서당훈장댁이었기에 가능했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한문에 친숙했다. <천자문>은 기본이고 <사자소학> <동국사략> <격몽요결> <명심보감>을 독파한 후 <사서삼경>까지 맛을 본 것은 행운이었다. 요즘 학생들은 한자(漢字)를 너무 몰라 큰일이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단지 글쓰는 게 좋아 이과계통이면서 학교신문 기자로 편집도 하고 기사도 썼더니 이래저래 소문이 나 학생 신분에 <약업신문>에 글도 실리고 이선근총장 추천으로 졸업후 입대할 때까지 <서울신문> 문화부에서 기자로 1년여 일하기도 했다(당시 공채와 추천입사를 병행했다). 


수도육군통합병원에서 약재관으로 군복무를 한 것이 행운이었다. 서울대병원 의사들이 출장진료를 하는데, 어깨너머로 열심히 배운 게 피부병 전문치료. 전쟁 직후라 그런지 피부병이 만연했다. 환자들의 ‘쯩’(증상을 이름. 된소리로 발음하는 데 특이했다)에 따라 김동문이 제조한 연고는 백발백중, 특효가 있었다. 제대 후 1965년 낙원동 헐리우드극장 근처에 차린 약국이 ‘가야약국’. 가야약국은 전국에 피부병 전문으로 소문이 났다. 휴일에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문을 밤 12시에나 겨우 닫을 정도였으니, 돈을 갈퀴로 쓸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약국은 2000년까지 영업을 했으니 무려 36년간이나 약사로 이름을 날렸다.

*87년 서정주-박재삼시인 추천 등단…91년 처녀시집 시작 시집 8권 펴내*


그러나 김동문은 마음으로 늘 허전했다. 약국 경영이야 생업(生業)이지만, 뭔가 가치있는 일에 몰입하고 싶었다. 그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피부병 연고를 만드는 것과 우리말과 글을 갈고 닦아 시(詩)를 쓰는 일이었다. 틈만 나면 시상(詩想)에 잠겼다. 무수한 습작 끝에 87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서정주, 박재삼, 김해성시인으로부터 <한국시> <문학세계>지 추천을 받았다. 실력을 인정받은 것같아 뛸 듯이 기뻤다.


더욱 시작에 전념, 마침내 1991년 첫 시집 <읊은 가락에 영그는 그리움>을 지천명(知天命)을 넘겨 펴낼 수 있었다. 잘 쓰지 않은 우리말, 이미 사어(死語)가 된 토속어들을 시어(詩語)로 발굴, 하나하나 숨을 불어넣어주는 일은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일이었다. 세종대왕이 이날 평생까지 그렇게 존경스러울 수 없다는 김동문이 몇 년 째 뒤적이며 모르는 단어들을 적어놓은 노트만 해도 수십 권이다.


금성출판사가 발간한 두 권짜리 <우리말사전>(김민수, 고영근외 저)은 한 질(帙)은 진작 ‘작살’이 나고 새로 산 사전도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맛깔스럽고 다양한 어찌씨(부사)나 꾸밈씨(형용사)가 어찌나 많은 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것을 하나 하나 캐내 시어로 만드는 작업을 내가 한다는 보람이 있다”는 김동문은 학문에 몰두하는 어떤 젊은이보다 우리말과 글의 사랑이 뒤지지 않을 것같았다. 어떤 단어가 생각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잊어먹지 않기 위해 노트에 적어놓는다. 등산갈 때에도 볼펜과 자그마한 노트는 필수품. 실제 깨알만한 글씨로 온갖 아름다운 우리말을 적어놓은 노트를 보여준다. 언제부터 펜글씨도 사라지고 젊은 친구들이 필기구(볼펜, 만년필, 붓 등)로 글을 쓰지 않고 오로지 컴퓨터 키보드 자판만 두들리는데 큰일이라며 ‘육필’(肉筆.실제 직접 써보는 것)을 하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느낌이 든다고 역설했다.


헌칠한 키에 잘 생기신 김동문은 실제 나이보다 예닐 곱은 젊어 보이는데, 그 비결은 오직 하나, 30여년째 계속해온 일주일 두 번의 산행. 목요일엔 북한산 등 서울 인근 산을 혼자 타고, 일요일엔 친구들과 조금 멀리 나간다고 한다. 골프와 운전은 아예 배우지 않았다. 말하자면 특기(特技)는 우리말을 갈고 닦은 시쓰기이며, 유일한 취미가 등산인 셈. 요즘은 반신욕(半身浴)의 재미에 빠졌다. 하루 한 차례 20분간 반신욕을 했더니, 온갖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기분이 날아갈 것같다며 반신욕 예찬에 침이 마르다. 지금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명동에서부터 오피스텔(종로구 인사동)까지 걸어다닌다.


건강의 비결중 하나는 ‘규칙적인 생활’과 소식(小食). 다람쥐 쳇바퀴 생활이지만, 저녁 10시 잠자리에 들어 새벽 4시에 일어나고 약국 문을 9시에 열고 9시에 닫으며 목요일엔 천하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혼자 가까운 산을 오르고 일요일엔 벗들과 조금 먼 산을 가며, 틈틈이(이젠 主業이 되었지만) 시상을 다듬기에 바쁜, 너무나 규칙적인 생활이 건강의 비결 아니겠냐며 껄껄 웃는 호남형(好男型)의 김동문은 지금도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을 법 하다.


*48년만에 찾은 모교 발전상에 깜짝 놀라…후배 사랑의 길 찾을 터*


김동문이 60년 졸업후 모교를 처음 찾은 것은 지난 3월 26일 <엄마는 신입생>이라는 이색 컨서트장이다. 모교의 발전상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고 한다. 사모님과 둘러본 모교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달리 없었다. 김동문부부를 모신 심상철동문(약학과 56학번 동기. 현재 사회복지대학원 재학)은 “김동문이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재력가도 되는 만큼 앞으로 모교에 대한 관심과 후배들에 대한 사랑도 부탁했다. 얼마 전 준공한 수원 자연과학캠퍼스 약학관도 꼭 구경시켜 드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1남2녀, 자녀들도 잘 가르치셨다. 장남(43)은 영국에서 대학을 나온 후 박사학위까지 마치고 귀국, 경희대에서 영상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근DMB 개발의 일등공신으로 국무총리상도 받았다. 큰딸(39)은 런던대에서 인공지능을 전공한 이학박사로 영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막내딸(35)은 ‘에스팀’(Esteem)이라는 연예기획사를 경영하고 있는 커리어우먼이다.


눈을 감는 날까지 우리말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김동문의 시작(詩作)이 빛을 발하여 서정주-박재삼시인을 잇는 서정시의 대가로 우뚝 서시기를 빌며 돌아오는 길엔, 여운처럼 반주로 한 잔 따라주신 누룽지 동동주맛만 고소하게 남았다. 김동문은 최근 쓴 150여편을 묶어 제8시집을 준비중이다.

한편으로 김동문은 “과욕같지만 소망이 있다면 제10시집까지 내고 시전집을 발간하여 문학활동을 마무리하는 것과 부동산(약국을 경영하며 인근 자투리땅을 사놓은 것들을 팔아 인사동에 5층건물을 샀는데 시가로 200억을 호가한다)을 처분하여 ‘종합예술학교’(가칭)을 설립, 막내딸에게 운영을 맡기는 것”이라며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는 것은 의무”라고 말하고 너털웃음을 크게 웃어주셨다.



(글 최영록 성균관대 홍보전문위원/ 사진 이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