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진품명품’의 친절한 위원님
김영준동문 탐방기

  • 226호
  • 기사입력 2011.04.15
  • 취재 최영록 기자
  • 편집 신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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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진품명품’ 감정위원 김영준씨,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은 왠지 마음부터 설렜다. TV에서 여러 차례 얼굴을 본 때문인지 처음 만나 인사를 하는 데도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숙한 느낌이었다.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자료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는 그분은 우리 학교 금속공학과(현재 신소재공학과) 69학번 동문. 학교 다닐 때의 이름은 김진국, 수년 전 등산사고로 개명을 했다. 조계사 정문 건너편 2층에 있는 사무실 이름이 ‘시간여행’이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서너 세대 전의 세상에 와 있는 듯했다. 사무실 한복판에 가득 쌓여 있는 온갖 잡동사니 생활용품들, 고문서, 사진, 잡지, 포스터, 성냥갑 등은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플만한데, 선배는 이게 다 재산이라며 TV속 ‘친절한 위원님’답게 이것저것 설명을 보탰다. 골동품들이 따로 없었다. 그 분야에 취미가 있는 직원 2명과 함께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해 가장 괄목할만한 성과는 조선일보 창간호(1920년 3월 5일자?1면은 아직껏 발견되지 않고 있다)를 발굴하여 ‘친정집’에 돌려 보낸 것이었다고 한다. 그 신문으로서는 50년도 넘게 찾던 희귀한 자료를 찾았으니 그 값이 문제였으랴. 그외에도 한국 최초의 전차 개통 자료들, 청계천 최초의 사진, 대한제국 최초의 보험증권 등 그가 발굴하여 발표한 근현대자료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고, 지금도 추적중인 분야가 많다고 한다.


김동문은 서울 태생으로 동성고를 졸업하고 우리 대학에 입학, ROTC 11기로 장교 예편 후 당시 잘 나가던 종합무역상사에 취직했다. 15년 넘게 일하던 회사를 떠나 해태상사로 이직, 책임자로 일했다. 80년대 초부터 틈만 나면 인사동에 들락거리고 보너스를 받을 때마다 조선 중기 회화(그림)를 수집하게 된 것이 이날 이때까지 ‘이 동네’를 못떠나게 됐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구하고자 한 그림이 워낙 희귀하여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린 것이 한국 근현대사 자료였다. 어떤 것 하나 허투루 볼 것이 아니었다. 분명코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이 모든 자료는 문화사적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생활용품이든, 신문 잡지나 책이든, 사진이나 영화포스터, 앨범, 레코드판도 다 자료였다. 대한제국 관보, 미군정청 관보, 정부의 각종 홍보 포스터, 포고문, 담화문 등도 훌륭한 자료가 되지 않던가. 광주항쟁때의 각종 유인물이나 휴전선 근처에서 북한이 뿌린 삐라나 북으로 보낸 전단도 귀하게 모아놓았다. 심지어 광주항쟁 시민수습위원이었던 당시 판사의 법복까지 수집해 놓았다. 보통 사람이라도 무심코 버리는 물건 하나하나가 다 소중했다.


조선시대 때부터의 우리의 전통인형은 750점이나 소장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전통인형 개인전을 열어주며 도록까지 만들어줬다. 그렇게 30여년을 지독한 ‘수집병’(蒐集病)에 걸렸다. 역시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는 옛말이 맞는가. 어떻게 ‘미치지 않고서’ 이런 재미없는 일을 한단 말인가. 아니, 본인은 재미있다고 하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랴. 수집하는 과정에서 에피소드도 헬 수 없이 많을 것은 당연한 일. 전국의 중개상 10여명과 일본 미국의 경매시장에까지 은근히 줄을 대놓았다. 일본에는 식민지시절 강탈하여 밀반출한 근대사 자료들이 수두룩했다. ‘물건’이나 ‘문건’이 나왔다고만 하면 어떤 수를 쓰든 구입해야 직성이 풀렸다. 일본 출장이 무릇 기하인 까닭이다. 간송 전형필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만금같은 문화재들이 얼마나 많이 유실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듯이, 돈이나 문화사적 가치가 없을 것같은, 어찌 보면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것들만 모으는 재미에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수만 점을 모아 임대창고에 쌓아두었다. 전국에 개인창고가 3곳이나 있다. 집에는 가장 귀중한 것 몇 점만 보관하고 있다.



최근래 관계기관으로부터 양도해 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으면서 그동안 받은 스트레스가 풀리고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정부나 민간기관의 각종 문화기획전에서 자문이 쏟아졌고, 물건이나 문건을 팔거나 빌려달라는 주문도 많아졌다. 어느 기획전은 세트장 연출까지 도맡아야 했다. 그동안 그가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건국 50주년’ ‘한국전쟁 50년’ 등 국가급 전시회도 여러 번이었다. 모 신문사의 ‘아! 어머니’라는 특별기획전에서는 전시/연출/대여(제공) 등 1인 다역(多役)을 했다. 오는 3월 20일 SBS 밤 11시 ‘일요일밤’에서는 ‘한국의 커피와 다방문화’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는데, 그의 보관자료도 일부 소개하며 인터뷰했다고 한다. 취미가 어느덧 수집 특기가 되었고 중독이 되었으며, 회사를 떠난 후에는 아예 만년 전문직업인 콜렉터가 되었다. 전문직업인으로서 보람과 명예 그리고 돈이 따라왔다.

김동문을 알게 된 것은 최근 어느 의뢰인이 보내온 한 장의 문서 때문이었다. 문건은 1951년 3월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에서 거행된 성균관대학 졸업식에서 당시 총장인 심산 김창숙선생이 두루말이 한지에 직접 쓴 졸업축사였다. 토씨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단어가 한자로 되어 있고 한지에 붓으로 쓰여 있었다. 의뢰인은 심산선생의 친필이냐는 것과 친필이라면 감정가는 얼마나 되겠느냐고 물었다. 모교와 관련된 것이라 눈이 번쩍 띄었고, 학교에 혹시 심산선생의 친필 글씨가 남아 있느냐고 홍보팀에 문의를 한 것. 다행히 학교 박물관에는 심산선생이 직접 쓴 족자 두 개가 전시돼 있었고, 최근 학술정보관 교사자료실 담당 선생이 발견한 1955년경 사임 직전에 쓴 두 통의 편지가 있었다. 육안으로도 심산선생 친필이 분명했다. 내용은 전쟁통에 졸업해 사회로 진출하는 제자들에게 투철한 국가관을 강조하고, 유교의 근본정신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을 몸과 마음으로 익혀 실천하여 사회에 보탬이 되라는 것이었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단어들도 소리나는 대로 표기한 것이 많은 것으로 미뤄 아마도 심산선생이 직접 쓴 것으로 보였다.


의뢰인은 또다른 성균관대 관련 자료도 보여줬다. 그중에 몇 점은 떼를 쓰다시피해 구입했다고 한다. 졸업 후 처음으로 모교에 의미있는 자료를 기증하고 싶었다고 한다. A3 크기의 ‘단기 4292년도(1949년) 각과 수업시간표’에는 당시 내로라하는 교수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박종화(국어) 이하윤(국문학) 피천득(영시) 조윤제(국어) 이희승(국어학) 변영로(국어) 변영만(중국문학) 이휘영(불문학) 손우성(불문학) 김진섭(수필) 유정기(유학) 이관구(경제사) 김경탁(유학) 장익봉(세익스피어) 한태연(법학) 유진(영어) 염상섭(문학각론)…. 아, 이 얼마나 쟁쟁한 학자들이던가. 또한 1955년 동창회에서 습자지에 펜으로 써서 ‘총장선생’에게 보낸 장문의 건의문과 61년 브로셔와 65∼66년 대학요람 그리고 56년 이훈구총장 명의의 입학허가서까지 있었다.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 관심도 없고 가치도 없겠지만, 학교측에서는 눈이 번쩍 띌 사료(史料)가 아닌가. 선배의 가상한 뜻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야기는 갈수록 흥미진진해졌다. 자리를 인사동 골목 ‘해인’이라는 두부 잘하는 음식점으로 옮겨 동동주 한 잔에 점심을 먹어가며 이어졌다. 아무튼 ‘보통의 선배’는 아니었다. 기자는 모교의 소식을 전했다. 선배가 다닐 때의 캠퍼스를 생각하면 완벽하게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꼭 한번 와 보시라고, 예전 건물 중 남아 있는 것은 교수회관과 학생회관 딱 두 동(棟)이라고, 문과대 석조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건학(建學) 600주년을 기념한 기념관을 1997년 멋들어지게 지었다고, 지금 박물관에서 ‘탁본으로 본 한국문양’전을 하고 있으니 오셔서 박물관 도록도 챙기고 관람해보시라고, ‘성균관대학교 600년사’ 1질(천, 지, 인편)와 ‘600년 사진사’도 드리겠다고, 자연과학계열은 벌써 30년 전에 수원 천천동에 자리잡아 훌륭한 캠퍼스가 되어 있다고 하니 놀라신다. 그중에서도 ‘전공’인지라 역시 탁본전과 자료에 관심을 보이신다. 내처 후배로서 외람되게 ‘주문’을 했다. 조선조 유일하게 518년 동안 존속돼오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 교육기능을 빼앗긴 국립대학 ‘성균관’과 1946년 9월 25일 개교한 ‘성균관대학’의 ‘멸실된 36년의 역사’ 공백을 메워줄 각종 자료들을 찾아달라고 말이다. 성균관의 맥을 근근히 이어갔던 ‘경학원’ ‘명륜전문학교’ ‘명륜학원’ ‘명륜연성소’ 등에 관련한 자료들이 어딘가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법했다.


우리에게는 ‘교사(校史)자료실’이 있어 약간의 자료들이 있긴 하지만, 근대의 것은 거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해방 직후 성균관대학이 성립하게 된 경유를 정확히 밝혀줄 자료도 거의 없는 편이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한가.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선생이 왜 40대 후반 우리 대학 졸업식만 있으면 대성전앞 단체사진 맨 앞줄에 심산선생, 위당 정인보선생과 같이 앉아 계셨던가도 자료로 증명이 되어야 할 일이다. 이 궁금증은 효창동 백범기념관에 가서야 풀리게 됐다는 말씀을 드리니 더욱 놀란다. 백범이 당시 학교 건물을 지은 책임자에게 선물한 ‘성균관대학 후원회장’이라는 직함을 쓴 족자글씨 두 편이 전시돼 있었다. 백범은 심산선생과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지였으며, 심산의 요청으로 ‘성균관대학 후원회장’을 맡았던 것이다. 자료는 이런 것이다. 그 직함을 입증할 문서는 유실됐을망정 족자글씨와 사진 몇 장으로 증명이 되고 있지 않은가. 후배의 열띤 설명에 선배는 조금은 “명색이 이런 일을 하는데 정작 모교의 자료에는 등한시했다”며 쑥스러워했다. 앞으로는 진짜 신경을 바짝 쓰며 식민치하와 해방직후의 모교자료 수집에 열을 내겠다고도 했다. 순식간에 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듯하여 기분이 좋았다. 연신 들이켜는 동동주까지 맛이 있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선배님의 말씀은 아팠다. 당신한테 많은 대학관계자들이 찾아와 자문을 받아갔는데 모교에서는 한번도 와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학관계자들이 선배를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값을 고하하고 자기 학교의 역사적 자료를 찾아달라는 것. 국가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나 특허청, 관세청 등 국가기관과 서울대, 연대, 고대의 관계자도 다녀갔으며 서울시립대, 배제대학교, 덕성여대, 경기고등학교, 보성고교, 경기여고 등도 역사찾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건학 600년이 넘는 모교에서는 이제껏 누구 하나 전화 한 통, 방문 한 번이 없었다는 말씀은 교훈적이었다. 솔직히 선배의 고언(苦言)은 진작에 귀를 기울였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600주년기념관에 ‘역사관’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래서 젊은 후배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그 친구가 자발적으로 성균관 자료찾기에 나서 소기의 성과가 있었고, 그것들을 모두 교사자료실에 기증했다고. 거기에는 일제치하 경학원 논문집도 몇 권 있다고. 그러니 이 방면에 전문가이신 선배께서 적극 동참해달라고 간곡히 말씀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 선배가 기증한 소중한 자료봉투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어’(大魚)을 낚아주실 것을, 갈수록 선배가 해온 ‘작업’이 빛이 나기를, 덩달아 우리 학교의 명예가 드높여지기를 기원해본다.

후기 : 심산선생이 직접 쓴 1951년 3월 졸업축사 문건은 한국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 즈음에 ‘진품명품’에 출연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이때 심산선생이 누지 간략하게 소개하고 친필편지와 족자글씨 등을 보여주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우리 학교의 ‘빛나는 홍보’가 되리라.


취재 ㅣ 최영록 전문위원(yrchoi@skku.edu)
 편집 ㅣ 신주희 기자(wngml901@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