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전문가’ 최영록 동문의 ‘홍보학 개론’

‘홍보전문가’ 최영록 동문의 ‘홍보학 개론’

  • 313호
  • 기사입력 2014.12.11
  • 취재 김세원 기자
  • 편집 윤명지 기자
  • 조회수 7679

모교 홍보전문위원으로 10년 9개월간 재직 모교 헌신
한국고전번역원 대외협력실장으로 ‘제 2의 삶’ 꿈꾼다

종종 언론 매체에서 우리 학교 미담이나 우리 학교의 독특한 학우를 소개하곤 한다. 이런 미담들은 정치적인 사건에 비하면 사소하고, 소개되는 사람들은 유명인이 아닌데 어떻게 언론에 소개 될까. 답을 말하자면 이런 기삿거리들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 홍보전문위원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고전번역원 대외협력실장을 맡고 있는 최영록 동문(영문 76)을 만나보았다.

간략하게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최영록 동문이 먼저 꺼낸 말은 개교와 건학의 차이를 아냐고 역 질문을 했다. “다른 대학들은 학교를 세웠다는 말을 개교나 창학이라 부릅니다. 건학이라고 부르는 곳은 우리 학교뿐입니다. 학문을 일으킨다는 뜻의 건학은 조선시대부터 학문을 세워온 우리 대학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내가 소속했던 단체가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가를 이해하고, 스피커처럼 대외에 알리는 것이 홍보맨으로서 제가 했던 일입니다.” 최 동문은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부터 홍보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물론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쓰고, 넓은 인맥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기본은 홍보하려는 대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학교 영문과 졸업생으로서 학교의 역사와 성대의 정체성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공부하는 과정에서 우리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습니다. 자부심이 생기니 자연스레 적극적으로 우리 학교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우리 대학 대외협력처(현 기획조정처)에 있을 때 했던 홍보활동을 보면 열정 그 자체이다. 최 동문은 학교 전체 구성원(학생, 교수, 교직원, 20만 동문)들을 대상으로 발간하는 소식지 <성균 소식>을 2005년 9월에 창간했고, 이 안에 학교를 대표하는 컨텐츠를 담기 위해 ‘역사 속의 성대’ ‘박물관 수장고’ ‘다이내믹 성균인’ 등의 코너를 신설했다. “지갑을 열어보면 1천 원짜리에 나오는 인물이 퇴계 이황선생으로 성균관대 총장(대사성. 정3품)이다. 5천 원 권은 성균관대 장학생(율곡 이이. 1554학번)이다. 이어 1만 원 권의 주인공은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세운 대학)이므로 성대 이사장이고 최고액인 5만 원 권은 신사임당이니 율곡선생의 어머니이므로 당연히 성대 학부모이다”라는 유명한 ‘성균관 지폐론’을 처음 활자로 못 박은 사람이 최영록 동문이다.

이것은 모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성과이다. 외부에 보도자료를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배포하는 열정을 보여, 10년 9개월 동안 1천 건이 넘는 보도자료를 작성한 진기록을 남겼다. 홍보팀에 해마다 펴낸 ‘언론에 비친 성균관대학교’라는 150페이지 분량의 책자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런 결과, 최 동문은 한국대학홍보협의회와 우리 학교 총장으로부터 ‘홍보 최우수상’과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최 동문은 가장 보람찼던 성과를 주요 언론사 사회면에 우리 학교의 미담이 5년 연속 톱으로 실린 것을 꼽았다. “우리 학교는 학부모도 학생처럼 포용하고 소통하는 것이 큰 장점인데, 이런 점을 언론에 알리면 우리 학교의 이미지도 좋아지고 외부 언론에서도 모범사례로 크게 반깁니다. 특히 독서문화진흥 캠페인인 오거서운동은 언론에서도 좋아하는 주제여서 5년 연속 사회면에 크게 톱으로 실렸습니다. 이렇게 제가 배포한 보도자료의 가치가 인정받고 학교의 이미지가 좋아지면 성취감을 느끼죠.”

최 동문의 장점은 막대한 양의 생활글쓰기였다. “대학생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헌 책방을 돌아다니며 책 읽기가 취미였습니다. 문학에는 재능이 없다고 느꼈지만 평생 글과 관련된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죠.” 실제로 그는 이후 동아일보에서 20년 동안 내근기자(교열부, 편집부, 전파뉴스부)로 일했으며, 막대한 양의 글쓰기는 ‘공감의 글쓰기’로 이어졌다. 그는 2004년부터 2005년 4월까지 ‘자유인’(백수)생활 1년 2개월 동안 108편의 ‘백수일기’를 썼으며, 2008년 우리 학교 출판사의 ‘우수도서 출판지원사업’에 선정돼 출판된 <나는 휴머니스트다>를 비롯한 6권의 수필집과 문집(‘백수의 월요병’ ‘은행잎편지 108통’ ‘어느 백수의 노래’ ‘대숲바람소리’ ‘쉰둥이들의 쉰 이야기’ 등)을 펴낼 정도로 많은 글을 써왔다. 지금도 그는 블로그(yrock22.egloos.com)에 ‘살며 사랑하며’라는 제목의 생활칼럼을 쓰고 있다. 최 동문의 글 중 가장 호응이 좋은 글은 생활형 칼럼인데, 이런 공감의 글쓰기는 다양한 나이 대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좋아하는지 사람에 대한 이해가 선행하므로 가능하다.

후배들에게 한 마디 말을 부탁하자, 최 동문은 모교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저는 우리 학교의 가장 큰 자랑거리이자 정체성(identity)이 역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문과 02학번인 권준현이라는 동문이 있는데, 이 후배는 우리 학교의 역사가 왜 600년인가, 어떻게 성균관의 정통을 이어 받았는지에 대해 계속 연구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경학원으로 강등 당했던 우리 학교가 어떻게 명맥을 유지했는지 헌책방을 뒤져가며 당시의 ‘경학원 논문’(경학원 잡지‘)들과 사진 기록을 모아 학교에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꼭 이 후배처럼 몰입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학교의 재건조인 심산 김창숙 선생이 어떤 분이셨는지, 캠퍼스 안에 있는 명륜당과 대성전이 어떤 역사와 의의를 갖고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기가 어떤 곳에 속해 있는지 아는 것은 자신의 뿌리를 아는 것이고, 자신의 뿌리를 아는 것은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할지 알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학교에 대해 알고, 고전을 읽으며 우리 선배님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앎으로써 더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영록 동문이 학교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했던 만큼 그의 관심사가 우리 한국고전으로 이어진 것은 예정된 수순인 것도 같다. 최 동문은 현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관찬사서를 비롯하여 수백 종의 문집, 의궤나 법률서적, 수학서, 천문서 등의 특수고전을 전문적으로 번역하는 한국고전번역원(교육부 소속 전문학술기관)의 대외협력실장으로서 우리 고전을 대중들에게 알리는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 최 동문이 지난 10여년간 모교의 홍보와 위상 정립을 위해 애정을 갖고 노력한 것처럼, 이제부터는 고전번역원의 귀중한 작업들을 언론매체 등을 통해 널리 알려 우리의 고전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보물창고’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일에 앞장서지 않을까. 종로구 구기동에 있는 한국고전번역원 정문 앞에서 두 팔을 끼고 기념사진을 찍어준 최 동문의 앞길이 양양하기를 빌면서, 돌아오는 길 ‘자신의 현재의 일’에 충실한 선배가 믿음직스럽고 한편으로 자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