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br>래퍼 피타입

“지금 이 순간......”
래퍼 피타입

  • 338호
  • 기사입력 2015.12.24
  • 취재 이수진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 조회수 13829

"인생은 언제나 스스로 부딪혀 경험하고 도전하는 사람에게 더 큰 영광을 안겨준다."라는 J.허슬러의 말이 있다.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에 항상 도전하는 삶을 사는 피타입(철학 98)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랫동안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래퍼 '피타입'입니다. 98년도에 성균관대 철학과에 입학한 아저씨라고도 할 수 있네요. 피타입이라는 이름에 별 의미는 없어요. 당시 이름 뒤에 무슨 무슨 스타일이라고 말 붙이는 게 유행이었어요 본명인 강진필의 필, P에 타입이라는 말을 붙인 거죠. P스타일은 너무 따라하는 느낌이 났거든요. P에 멋진 뜻을 붙여보려고 해봤지만 다 부질없더라고요. 피타입은 그냥 제 본명에 타입을 붙인 이름이에요. 딱히 멋있는 뜻은 없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항상 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 춤추는 친구들 옆에서 음악을 틀어주면서 놀기도 했어요. 음악을 하신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음악을 하시다 보니까 그 길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안정된 직업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아셔서 제가 음악 활동하는 것을 반대하셨어요. 다들 아시죠? 주변에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잖아요. 대학에 입학하면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아버지와 약속했어요. 그때 우리 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제가 동성고등학교를 졸업해서 고등학교랑 제일 가까운 대학이었거든요. 운 좋게 우리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철학은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분야에요. 고등학교 때 윤리 과목을 배우면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렇게 대학을 입학했어요. 대학에 다니면서 내가 대학생으로서 지금 성균관대학교 학생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했어요. 진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미식축구동아리에서도 열심히 활동하고 음악 활동도 열심히 했어요. 한 번에 공부와 운동, 음악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건 너무 힘들더라고요. 당시에는 공부보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음악이나 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제가 음악을 시작할 당시에는 인터넷 발달이 안되어있던 때였어요. 힙합이 대중화되어있지 않아서 힙합을 접하기가 힘들었죠. 힙합보다는 헤비메탈이나 락을 많이 듣던 시기였어요. 저는 그런 음악에 관심이 없어서 힙합 미군 방송이 공중파로 나오는 걸 봤었어요. 그때는 해외 힙합 음반들이 정식으로 수입되어 오는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을 때라 해외 공연 가시는 아버지에게 어떤 가수의 어떤 앨범을 사달라 부탁을 하기도 했죠. 그렇게 음반을 구해서 음악을 듣고, 무작정 미군 부대 앞에 찾아가서 철 지난 힙합 잡지 구해다 보기도 하고, 중고 카세트테이프 같은 거 구해서 들었어요. 그렇게 요즘 말하는 리스너가 됐습니다. PC 통신으로 '돕사운즈'라는 힙합 동호회에 들어가서 활동하기도 했어요. '돕 사운즈'는 창작활동을 장려해주는 그런 동호회가 아니어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SNP'라는 동호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버벌진트나 휘성같은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을 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단지 취미활동으로 할 생각이었죠. 그런 시절에 부산에서 공연해달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공연비는 바라지도 않았고, 재워주고 먹여주면 무조건 승낙했죠. 그동안 지방음악은 서울보다 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부산에 가보니까 그게 아닌 거예요. 제가 생각 했던 것보다 음악 수준이 굉장히 높았어요. 집에는 미식축구부 합숙훈련이라고 얘기해놓고 부산에 내려가서 음악을 하곤 했어요. 공부는 안 했지만 음악 활동 하면서 아르바이트로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한 달에 100-200만 원씩 벌었어요. 자기 밥벌이는 하니까 부모님도 큰 반대는 안 하셨죠. 제가 첫 앨범을 낸 뒤로는 아버지께서도 인정해 주시고, 제 앨범에 드럼을 모두 쳐주실 정도로 많이 서포트 해주셨어요. 설득에 성공한 거죠.



2004년에 시작해서 2006년에 제 첫 앨범이 나왔어요. 데뷔앨범 치고는 굉장히 잘됐죠. 그때는 가요계에서 아무도 힙합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힙합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서도 앨범 판매량이 10위에서 15위권 이내였고, 4만 장 이상을 팔았어요. 되게 잘 된 거죠. 그런데 계약과정에서의 문제인지 소속사와 투자자와 저와의 관계에서 저는 아무런 수입을 얻지 못했어요. 그 와중에 저와 계약한 회사는 무리한 투자 때문에 망하기도 했어요. 어린 나이의 미숙함 때문이었죠. 앨범은 냈고, 알아보는 사람들은 있는데 수입은 하나도 없고. 공사장에서 시멘트를 섞다가 팬에게 사인을 해드리는데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그러다 2006년 YG에서 레슨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자가 투애니원이었어요. 그렇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죠. 힘든 상황을 겪고 나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랑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시 믿을 만한 사람과 함께 2008년에 2집 앨범을 내고 서른이 되니까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광고회사에 취업도 했고 5년 동안 광고회사에 다니기도 했어요. 수입도 많아지고 생활이 편해지니까 나쁜 피가 5년 만에 다시 작동했습니다. 같이 음악 다시 하자는 전화가 오기도 하고. 저는 선천적으로 편한 상태를 못 견디는 성격인 것 같아요. 음악도 다시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브랜뉴 공연을 마무리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공연인데 잘 끝내서 좋네요. 제가 추울 때 작업하는 걸 굉장히 좋아해요. 이번 겨울에 많은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작업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작업할 거예요. 원래 곡 작업도 했는데 제가 다 하는 것보다는 다이렉션을 주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지금은 가사 작업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어요. 저는 가만히 있으면 표현이 생각나는 편이라 생각날 때마다 메모를 해두면서 작업을 하는 편이고요. 정규앨범을 내기에는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다양한 것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 2곡이나 4곡짜리 싱글앨범 생각 중입니다.



여러분 모두 사랑하고요. 학교 공연에서 자주 뵙고 싶네요. 많이 불러주세요. 지금 상황에서 저는 대학생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말하기가 조심스러워요. 제가 대학생이었던 시기와 지금은 많이 다르니까요. 젊음을 즐겨라 이런말을 하기는 어렵네요. 살다보면 결국에는 사람이 젊을 때밖에 못 하는 것이 있어요. 그 시기가 아니면 하지 못할 것들이 꼭 있더라고요. 제가 대학 다닐 때 미식축구에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저는 오직 그 욕심 하나였어요. 지금 20살의 강진필이 성균관대에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내가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을 꼭 하자. 분명히 여러분들도 잘 찾아보시면 신선한 경험의 장들이 열려있을 거예요. 그런 것들에 과감하게 도전해보세요. 도서관에서만 살던 친구들보다 무전여행 다니고, 사진 찍으러 다니던 한량 같았던 친구들이고 쪽 분야로 더 잘될 수도 있거든요. 노예처럼 일한다고 하더라고 금수저처럼 삶이 한순간에 달라지지 않더라고요.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결국 중간지점에 도달할 거예요. 숨 좀 쉬고 살아도 그다지 인생에서 재앙은 없습니다. 그러니 실패에 대해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안도감을 가지고 살아도 괜찮아요. 사람은 좀 다쳐도 죽지는 않으니까. 매운닭 먹는 것과 같은 거죠. 매운맛도 느껴보고, 한 번씩 스트레스받으면 언젠가 그 맛을 즐길 수도 있어요. 그 맛을 모르면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쓸데없는 경험이라도 무조건 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진짜 해보고 싶었던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경험을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인생은 어떻게든 흘러가요.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됩니다. 그러니까 망설이지 마세요. 쫄지 마세요.